“자질구레한 모든 요소가 사실적이면, 거짓된 결론도 사람들은 저절로 믿게 된다.”

글쓰기 책 중 최고라 할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에 나오는 말이다. 무슨 말일까? 누구나 알다시피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등장인물과 그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에 국한된 것일 뿐, 그들이 발 딛고 사는 현실까지 허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수도를 대구라고 해버리면 현실감이 떨어져 소설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시대적 배경이 문재인 대통령 치하인데 경제가 날로 성장하고 국민 화합이 잘된다고 전제한다면 몇 쪽도 읽기 전에 책을 던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소설에서 주장하는 결론을 독자들이 납득하게 하려면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저자는 베트남전을 다룬 <하얀 전쟁>의 마지막 장면을 쓰기 위해 사건의 배경인 사직공원을 여러 차례 방문해 실제 모습을 스케치했고, 주인공이 그 사건 도구인 권총을 구하는 과정도 실제 있었던 사례를 재구성함으로써 현실감을 더했다. 이런 노력이 뒷받침된 덕에 <하얀 전쟁>은 많은 독자에게 찬사를 받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일러스트=안병현

정치도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부터 진심을 다할 필요가 있다. 자질구레한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쌓아야 큰일을 할 때 국민의 지지가 동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력욕에 사로잡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이들을 자기 사람이라는 이유로 고위직에 임명한 대통령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랬던 이가 갑자기 4년 중임제 개헌을 하겠다면, 야당은 물론이고 국민이 ‘정권 연장 음모’라며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할지언정 국민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애쓴 이가 개헌을 시도한다면? 야당이 반대할 수는 있겠지만, 국민은 그가 하려는 개헌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적극 지지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는 매우 안타깝다. 아주 사소한 것마저도 국민을 속이려 들고, 들킨 뒤에도 사과하는 대신 국민을 이겨 먹으려 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9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 인사 개편으로 교체된 전직 참모 4명을 관저로 불러 만찬을 열었다. 만찬은 두 시간가량 이어졌는데, 소주를 1병씩 도자기로 된 주전자에 담아 마셨으며, 같이 사진까지 찍었다고 했다. 이 모임은 상식적으로 5인 이상 집합 금지 위반에 해당한다. 전직 참모들과 만난 일이니 공적 모임도 아니었고, 설령 그들이 현직이라 해도 다음 규정에 걸린다. “회의 등의 전후로 이루어지는 식사 모임은 사적 모임으로 간주해 금지 대상에 포함된다.”

이 모임이 외부로 알려진 건 청와대가 스스로 보도 자료를 냈기 때문. 문 대통령이 얼마나 자상한지 알리려는 좋은 취지였겠지만, 그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깨어 있는 국민 한 분이 문 대통령의 방역 수칙 위반을 지적하며 종로구청에 민원을 제기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는 것이다. 과태료가 1인당 10만원이니 통 크게 비서들 몫까지 50만원을 낸 뒤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된다. “국민들이 코로나 방역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대통령이 돼가지고 방역 수칙을 어겼네요. 허허허.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국민에게 약속드립니다.” 소수 국민이 대통령을 비판하겠지만, 대다수 국민은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를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한다. ‘대통령도 저렇게 방역 수칙을 잘 지키는데, 우리도 잘 지켜야겠구나.’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1년간 괴롭힐 때 그랬던 것처럼, 문 대통령은 불리한 사안에 침묵하는 데는 도가 튼 분이다. 여기에 대해 비난하는 분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이 나라는 새로운 이슈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곳이며, 문 대통령은 이슈를 만드는 데 또 일가견이 있는 분. 대통령의 방역 수칙 위반은 곧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불행히도 문 대통령이 택한 방법은 하수 중의 하수였다. 뻔한 방역 수칙 위반을 적법한 행동이라 강변하게 한 것이다. 방역을 관장하는 중대본에 따르면 대통령이 국정 운영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은 사적 모임에 들어가지 않는단다. 전직 참모들이 얼마나 좋은 의견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꼭 참모직을 그만둔 뒤 얘기해야 했을까? 평소 기억력이 좋지 않아 맨 정신에 국민에게 약속한 것도 안 지키는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를 얼마나 잘 기억해서 국정에 반영할지도 의문이다. 여기에 대해 ‘역시 내로남불’이란 비판이 쏟아진 건 너무도 당연했고, 문 대통령은 돈 10만원으론 살 수 있었던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2년 전 문 대통령을 비방하는 전단을 배포한 30대 남성이 최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모욕죄는 친고죄, 즉 모욕을 당한 본인이나 그 대리인이 고소할 때만 재판에 회부할 수 있는 범죄. 그래서 대통령이 그 남성을 고소했는지가 주목거리였다. 많은 이는 인권 변호사 출신인 문 대통령이 설마 그 정도 사안으로 국민을 고소했을까 하며 회의적 반응을 보였는데, 그 ‘설마’는 사실이 됐다. 여론에 떠밀려 고소를 취하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대통령이 국민과 싸우겠다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

대통령도 인간이니 그 전단에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원래 욕을 먹는 자리, 그 정도도 참지 못해서야 어디 대통령 자격이 있겠는가? ‘삶은 소대가리’ ‘특등 머저리’ 같은 말에는 무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대통령이 국민에게만 가혹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대통령을 믿고 따를 이유가 있을까? 신뢰를 상실한 대통령, 그에게 남은 임기 1년은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국민은 그 저의를 의심할 테고, 하는 일마다 국민의 반대에 직면할 테니 말이다. 대통령에게 고언 드린다. 앞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계시라. 지금으로 봐선 그게 욕을 가장 덜 먹는 길이니까.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 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