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는 잘했어?” 근무시간 맞춰 편의점에 들어오는 효정씨 표정이 어둡고 차갑다. 딱딱하게 굳어 있다. “왜? 이사가 힘들었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효정씨는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사 비용 아끼려 최저가 업체를 검색해 이용했는데, 이삿짐 아저씨가 자꾸 신체 접촉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를 마치고 나서는 “땀이 많이 났는데 여기서 샤워 좀 하고 가면 안 되나?” 묻더라는 거다. “뭐 그런 xx가 다 있어!”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뭐야? 왜 가만히 있었어? 신고를 해야지!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내가 어디 사는지 훤히 아는데 어떻게 그래요.”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신고하면 지금 사는 집을 옮겨야 할 텐데, 이제 막 계약한 집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고해봤자 벌금이나 집행유예 정도 받고 풀려날 텐데, 보복이 두렵다고도 말했다. 그러니 ‘똥 밟았다’ 생각하고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하면 무조건 신고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것도 남자로서 내가 여성의 입장과 처지를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아저씨지만 편의점엔 ‘개저씨’(개+아저씨)가 참 많다. 사람들은 편의점 알바들이 점주와 다투고 그만둔다고 생각하지만 ‘손님에 질려’ 그만두는 경우도 꽤 많다. 거기에는 개저씨들이 크게 한몫 차지한다. 회사 건물 지하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지금은 그런 손님이 전혀 없지만 유흥가에서 편의점을 하던 때에는 숱한 개저씨를 만났다. 술 먹고 집적거리는 놈, 외모 갖고 희롱하는 놈, 이름이 뭐냐, 어디에 사느냐, 남자 친구는 있느냐, 근무 언제 끝나냐, 이번 주말에 뭐 하냐, 오늘 화장이 섹시하다, 얼굴에 색기가 흐른다, 전화번호 알려달라….
어느 여성 점주가 그런 사연을 쭉 말하길래 “신고하면 되지 않느냐” 했더니 동네 장사를 하다 보면 단골손님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때에도 ‘장사보단 원칙이 중요하지 않나?’ 속으로 생각했는데, 점주 입장으로서도 그렇고, 내가 여성의 처지를 너무 몰랐다.
최근에는 편의점에 여자 알바가 있는 시간만 골라 속옷 입고 나타나 변태 행각을 벌인 ‘놈’이 붙잡혀 화제가 됐다. 그놈 잡으러 경찰관들이 두세 명씩 짝지어 며칠간 잠복근무를 했다고 한다. 변태 녀석 하나 때문에 이 무슨 치안력 낭비란 말인가. 우리에겐 사진 보고 낄낄거리는 ‘웃기는 사건’이었을지 모르지만 피해 여성의 고통과 공포는 과연 어땠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그런 개저씨들과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마저 창피함과 미안함을 느낀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어쨌든 그런 개저씨의 출현 소식을 듣고 가게에 출동하거나 CCTV를 확인해보면 일단 또 한 번 놀란다. 그 외모가 너무 멀쩡한 것이다. 개저씨는 이마에 ‘나는 멍멍이’라고 써놓고 다니지 않는다. 반듯하게 트렌치코트 입고, 인자한 미소 지어 보이고, 포마드 기름 발라 단정히 7대3 가르마를 한 ‘선량한 시장님’ 얼굴이다.
며칠 전부터 편의점 앞 네거리가 떠들썩하다. 원래는 분명 내년이 지방선거가 있는 해인데 느닷없이 올해 또 무슨 보궐선거를 한다고들 난리다. 서울과 부산시장을 동시에 새로 뽑는다는데, 단언컨대 둘 다 ‘개저씨’ 때문에 치르는 선거 아닌가. 서울의 개저씨는 여성 비서에게 “냄새를 맡고 싶다, 킁킁” “섹스를 알려주겠다” 문자를 보냈고, 부산의 개저씨는 시청 집무실에서 보좌진을 성추행하고는 홀연 사라졌다.
편의점의 개저씨는 “꺼져, 이 ××야” 하고 밀어내면 끝인데, 정치판의 개저씨는 치워내는 데 큰돈이 든다. 새로운 시장 뽑는 데 드는 비용만 무려 천억원이란다. 재임 시절에도 세금을 개인 쌈짓돈처럼 펑펑 써대더니 마지막까지 돈 잔치를 벌이는구나. 그리고 내년에 또 선거를 치르니 이번에 새로 뽑힌 시장은 하루 3억원씩 ‘임기 값’을 치르는 셈이네? 육두문자가 마구 쏟아진다.
길게 줄이 늘어선 사전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편의점에 돌아왔다. 효정씨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계산대에 있었다. “뭐 해. 내가 근무 설 테니 어서 투표하고 와.” 개저씨 하나 청소하는 일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고생해야 하다니!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기표봉 제대로 드는 일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우리는 그렇게 웃음기 거둔 차가운 얼굴로 뚜벅뚜벅 투표장에 간다. 나라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