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수원지법 민사합의부에 조금 특별한 판사가 부임했다. 시각장애 1급,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김동현(39) 판사. 2012년 서울 북부지법으로 부임한 최영 판사에 이어 국내 2호 시각장애인 판사다.

한국 나이로 서른한 살에 시력을 잃은 김 판사는 지난해 10월 법조 경력 5년 이상 신임 법관 임용에 당당히 합격했다. 벌써 선고 재판을 여러 번 거쳤다는 그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 법복을 입는 날마다 긴장된다”며 웃었다. 최근 만난 김동현 판사는 ‘어떻게 재판 기록을 보느냐’는 질문에 노트북과 이어폰을 들고나왔다.

'국내 2호 시각장애인 판사' 김동현씨는 "모든 재판 자료를 노트북에 넣어두고 이어폰을 통해 듣는다"고 했다. 그는 "나는 다른 판사들과 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공정한 재판으로 신뢰를 쌓겠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보통 ‘판사’ 하면 두꺼운 법률서나 어깨 높이까지 쌓인 재판 자료가 떠오른다.

“내게는 노트북이 철제 캐비닛이고, 이어폰이 자료를 읽는 눈이다. 모든 자료를 노트북에 파일 형태로 저장해두고 ‘스크린 리더’라는 시각장애인용 소프트웨어로 듣는다.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라 점자에 익숙하지 않다. 귀로 듣는 수밖에 없다.”

-수원지법에 시각장애인 판사가 부임한 건 처음이라 들었다. 어려움은 없나.

“다행히도 아직은 큰 어려움 없이 근무하고 있다. 속기사 두 분이 재판 기록을 제가 읽을 수 있는 전자 파일 형태로 바꿔주고 있다.”

-사진 자료는 어떻게 보나.

“속기사가 말로 설명해주는데, 한 번에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그때는 오감을 다 동원한다. 사법연수원 시절 가해자가 피해자를 침대에서 목 졸라 죽인 사건에 대해 판결문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직접 침대에 누워서 베개를 끌어안고 졸랐다. 활동 보조인에게 ‘피해자가 이렇게 누웠나’, ‘목은 어떤 손으로 졸랐나’라고 물어보며 자세를 이리저리 바꿨다. 시각장애인이라 유리한 점도 있다. 다른 판사들과 달리, 나는 아무리 바빠도 재판 자료를 ‘스킵'(건너뛰다)할 수 없다.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야 한다. 보통 1시간에 100~160쪽 정도를 듣는다.”

김 판사가 “직접 들어보라”며 이어폰을 건넸다. 복잡한 법률 용어가 엄청난 속도로 쏟아졌다. 흡사 외계어 같았다.

-이렇게 빨리 들어도 모두 이해가 되나.

“그렇게 되더라(웃음). 나도 처음부터 이 속도로 들은 건 아니다. 처음엔 보통 말하기 속도보다 조금 빠른 정도로 들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자료를 들으며 공부하다 보니, 지금은 프로그램이 지원하는 최고 속도로 들어도 답답하다.”

◇ 사고 후 처음 배운 것, ‘똑바로 걷기'

김 판사가 원래부터 법조인을 꿈꾼 건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부산과학고등학교를 거쳐 카이스트(KAIST) 신소재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스스로 “학교 기숙사에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살던 천생 이과 학생”이라고 했다. 즐겨 하던 게임을 묻자 답이 줄줄 나왔다.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마비노기···.”

졸업 후 공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고, 제대 다음 해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입학했다. IT 전문 변호사가 돼 각종 기술 분쟁을 해결하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은 로스쿨 2학년 때 무너졌다. 의료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사고 날을 기억하나.

“2012년 5월 18일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가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고 8개월 후, 안동 유하사에서 한 달간 삼천 배 기도를 올렸다.”

-불교 신자인가.

“신자긴 하지만, 절에 열심히 다닌 적은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 거다. 그런데 기적이라는 게 간절하다고 생기는 건 아니더라(웃음). 첫날은 열 시간 넘게 절만 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눈물이 나더라. 그때가 사고당하고 처음으로 운 날이었다. 마지막 날 스님이 ‘육신의 눈은 감게 됐지만, 이제 마음의 눈을 떴으니 그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하셨다. "

-한창 나이에 시력을 잃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모든 걸 다시 배워야 한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처음 배우는 건 ‘똑바로 걷기’다. 시각 장애인은 다리가 조금만 불균형해도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방지하는 것이다. 발의 감각, 차도의 자동차 소리 등을 통해 직진하는 법을 배운다. 그다음엔 실내에서 길 찾기부터 시작해 버스, 지하철 타는 방법 등까지 모두 새로 익혀야 한다. 칼 쓰는 법, 바느질하는 법도 다시 배웠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보통 좌절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라도 할 수 있게 되니까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다. 처음 몇 주는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 혼자의 힘으로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을 수 있게 됐고, 나중엔 혼자 버스 타고 밖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됐다. 하나씩 성취할 때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부모님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사고를 당하고 몇 달은 어머니가 내 수발을 다 드셨다. 냉장고에서 물도 떠주시고, 화장실도 부축해줬다. 삼천 배도 어머니와 함께 갔다.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해주셨다. 어머니는 로스쿨 복학 후에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오셔서 2년간 등하교를 도와주셨다. 학교에선 친구들이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장애 학생 도우미를 자처해 함께 수업을 듣고, 밥도 먹었다.”

김 판사는 사고 다음 해 학교로 돌아갔다. 한 학년 후배들 도움으로 필기 자료를 받아 귀로 들으며 공부했다.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책 구하는 게 가장 고역이었다. 저작권 문제로 책의 디지털 버전을 구할 수가 없었다. 법조계에 시각장애인이 거의 없다 보니 예전에 변환된 전자 파일도 없었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변환 신청을 해도 실제 파일을 받기까지 최대 5개월이나 걸렸다. 중간고사까지 책 없이 공부한 경우도 있다. 그 전까지는 친구들이 건네준 필기와 교수님 수업만으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교재를 받으면 하루에 열 시간씩 들었다.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변호사인 김재왕 선배님이 공부법에 큰 도움을 주셨다.”

◇ 장애인 판사 많아져야

2015년 2월 성적 상위 15%에게 주는 우등상을 받고 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고법에서 2년간 재판연구원(로클럭)으로 근무했다. 이후 3년간 서울시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서 변호사로 일한 뒤, 경력 5년 이상 법조인을 대상으로 하는 법관 임용에 지원해 지난해 10월 합격했다.

김동현 판사가 항상 지니고 다닌다는 지팡이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나.

“학교에서 공익 인권법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로 나선 변호사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 ‘법률 문제는 결국 법원이 받아줘야 인정된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학생들이 법원에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그때 ‘내가 판사가 되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나도 ‘시각장애인 1호 판사’ 최영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영 판사와 운동도 함께 했다고 들었다.

“최영 판사님,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을 만드는 엑스비전 김정호 이사님이 ‘걷기 운동이라도 꾸준히 하자’면서 산책을 권유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운동을 안 좋아했는데, 막상 산에 올라보니 시원한 공기를 맡는 것 자체가 좋더라. 셋이 자주 등산을 다니다 나중엔 하프 마라톤까지 뛰었다. 2019년에는 ‘쇼다운’ 국가대표로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쇼다운은 탁구와 비슷한 시각장애인용 스포츠다. 테이블 위에서 공을 배트로 쳐서 상대방 골대에 넣으면 득점하는 운동이다. 요즘도 쉬는 날이면 쇼다운을 한다.”

이제 정식 부임 한 달 차. 법대 위에 앉는 게 아직 어색하다는 그는 “부장판사가 재판을 진행하는 걸 옆에서 들으며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판사가 재판을 맡는 것에 우려도 있을 텐데.

“법관 면접을 볼 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재판 당사자들과 좀 더 열심히 소통하겠다’고 했더니, 면접관님이 ‘법관은 판결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이 정답이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 신뢰를 쌓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법관들과 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일 뿐,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내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기피 신청을 한 경우는 없다.”

-법원에 장애인 판사가 적은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

“판사는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직업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준 미달의 법관을 채용하는 건 옳지 않다. 다만 장애인이 법률적 소양을 기르기 어려운 현실이 문제다. 당장 대학만 봐도 시각장애인용 교재를 갖춘 곳이 거의 없다. 인프라가 먼저 구축되면 장애인 판사도 자연히 늘 것이라 본다.”

‘판사를 꿈꾸는 장애인 후배가 있느냐’고 묻자, 로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 이름이 나왔다. 다른 장애인 법조인들과 함께 공부에 관한 조언을 해줬다고 했다. “그 친구가 세 번째 시각장애인 판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장애인 법조인이 많아져서 국민이 저희를 편하게 받아주시는 게 꿈입니다.” 김 판사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