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냐, 재개발이냐. 도심의 흉물로 전락했던 옛 연초제조창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렸다. 1946년 설립된 청주 내덕동 연초제조창은 한때 근로자 2000명이 담배 100억 개비를 생산한 국내 최대 담배 공장이었다. 청주는 물론 충북을 먹여 살린다던 거대한 산업 시설은 담배 산업이 위축되면서 2004년 폐쇄됐고 일대는 쇠락했다. 연초제조창은 철거도 재개발도 아닌 리모델링을 택했다. 옛 건물을 활용해 문화산업단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흉물은 예술이 됐다. 2018년 12월 연초제조창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문을 열면서 이 일대가 ‘핫플'로 떠올랐다. 개관 1년 만에 청주관을 다녀간 관람객만 21만명. 청주의 인구는 84만명이다. 국내 최초 수장형 미술관이라는 색다른 형태와 이색적인 전시, 공간의 변신은 ‘양반 도시' 청주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2019년 문화제조창이 완공되고 내덕동 일대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공간도 늘면서 2030세대의 문화 아지트가 되고 있다. 그 일대를 탐험했다.
◇속 보이는 미술관
유물이나 작품을 보관하는 박물관, 미술관의 수장고(收藏庫)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청주관에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구나 들어와서 볼 수 있는 개방 수장고가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지 못하면 밖에서 볼 수 있도록 수장고 내부를 훤히 공개한다. 유화 보존 처리, 유기·무기 분석 등을 진행하는 보존과학실도 개방하니 그야말로 ‘속 보이는 미술관'이다.
국내 최초 수장형 미술관인 청주관은 전시장이 아닌 수장고에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미술품 종류에 따라 수장고 형태는 차이가 난다. 비교적 온도와 습도, 빛에 덜 민감한 조각, 설치 미술품이 있는 1층 개방 수장고는 보관된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팔레트에 층층이 놓인 작품들이 창고형 마트에 진열된 상품을 보는 듯하다. 2층의 보이는 수장고는 수장고 내부에 전시된 작품을 유리 너머로 볼 수 있다.
4층 특별 수장고는 원래 연구용으로 쓰이는 공간으로 실제 수장고와 가장 유사한 형태다. ‘국립현대미술관 드로잉 소장품’전이 한창인 이곳엔 백남준, 이중섭, 유영국 등 작가마다 분류된 방에서 서랍식으로 보관된 작품을 볼 수 있다. 미술품의 전문적인 보존 처리, 검사 과정은 보이는 보존 과학실에서 공개한다. 평소에 경험해보지 못한 미술관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분! 청주관 연상흠 매니저는 “소장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미술관 문턱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5층 기획 전시실에서는 ‘우향(雨鄕) 박래현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 통역자’ 전시가 한창이다. 20세기 우리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이면서도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 여성이란 이유로 조명받지 못한 박래현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한 전시다. 서울 덕수궁관에서 청주관으로 옮긴 순회전은 5월 9일까지 계속된다.
박래현은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나 부유하게 생활했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 도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돼, 시상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운보 김기창의 그림에 반해 그의 집을 찾은 뒤 사랑에 빠졌다. 가난한 데다 청각장애까지 있는 김기창이었지만 ‘결혼 후에도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김기창의 아내와 4남매의 엄마로 살면서도 동양화에서 추상화, 판화, 태피스트리로 확장해나가는 박래현의 담대하고 실험적인 연대기를 감상할 수 있다.
순회전이지만 청주에서만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이 있다. 김기창이 그린 박래현의 이색적 초상화 ‘화가 난 우향’이다. 청각장애를 지닌 화가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 그리고 예술가로서 어느 것도 털어내기 어려웠던 박래현의 삼중 삶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집안일을 마친 밤 시간에야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박래현을 김기창은 ‘부엉이’라고 불렀는데, 늘 깨어있어 고단하고 그래서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박래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볼 수 있다.
전시를 관람하려면 국립현대미술관(mmca.go.kr) 홈페이지에서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무료.
◇흉물에서 핫플로
전시장을 나와 미술관을 둘러보면 연초제조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미술관 바닥과 골조, 옥상에 있는 물탱크도 연초제조창이 남긴 것이다. 담배 연기 뿜어내던 굴뚝도 그대로 남아 있다. 1946년 내덕동에 들어선 연초제조창은 청주를 대표하는 산업 시설이자 ‘솔’ ‘장미 ‘라일락’ 등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담배 공장이었다. 2004년 연초제조창이 문을 닫으면서 거대한 담배 공장은 도심의 흉물이 됐다. 공장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세우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옛 연초제조창은 문화산업단지로 변신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문을 열고 2019년 문화제조창이 완공되면서 일대의 변화가 시작됐다.
문화제조창 본관은 요즘 청주에서 인기 있는 장소 중 하나다. 이곳에 들어선 카페와 쇼핑몰, 열린 도서관 등 보고 즐길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헤이러스틱은 브런치 맛집으로 통하는 대형 카페다. 채광 좋은 창가에서 미술관과 잔디 광장을 바라보며 파스타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 감각적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보이드맨션도 인기다.
5층에는 무료로 다양한 책을 볼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이 있다. 대출은 하지 않는다. 대형 서점처럼 꾸며 도서관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문화제조창 내 빈 공간은 오는 9월 개최되는 청주공예비엔날레에 활용될 예정이다.
문화제조창 뒤편에 있는 동부창고는 옛 연초제조창에서 사용하는 담뱃잎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쓸모없이 방치되던 창고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 예술 교육, 체험 공간으로 변신했다. 1960년대 적벽돌과 목조 트러스트로 지은 공장 창고의 원형은 살려둔 채 내부 공간을 바꿔 복고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창고 벽을 채운 그라피티 덕에 이국적인 분위기도 난다. 코로나 때문에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활동이 축소됐지만 창고 사이를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에 좋다. 반려견 놀이터와 넓은 마당이 있어 산책 코스로도 인기다.
◇문화제조창의 나비효과
문화제조창이 활성화하고 유동 인구가 늘어면서 문화제조창을 둘러싼 내덕동 일대와 청주대 인근에도 새로운 공간과 핫플이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6월 동부창고 인근에 문을 연 일면식은 요즘 청주에서 손꼽히는 명소 중 하나다. 커다란 창문 너머 보이는 동부창고를 배경 삼아 LP판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필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해 지는 풍경도 ‘입덕' 포인트다. 해가 지길 기다리며 입에 넣는 달콤한 카눌레와 마들렌도 맛있다.
같은 건물 1층에 EATS(이에이티에스)라고 부르는 포크 커틀릿 전문점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이 추천한 맛집. 하루 50인분 한정 국내산 1+ 등급 무항생제 암퇘지 냉장육으로 만든 포크 커틀릿을 판다. 토마토와 크림 소스를 반반 곁들이는 ‘토마토&크림 반반 커틀릿’이 인기다. 언노운은 호텔 출신 요리사가 운영하는 브런치 레스토랑. 1인 식당이라 1시간 1팀만 예약제로 운영한다. ‘아보카도 오픈 토스트’ ‘부라타 치즈샐러드’ 등 건강한 브런치를 즐길 수 있다.
문화제조창에서 시작된 변화 바람은 골목길로도 번졌다. 문화제조창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운리단길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운천신봉동 행정복지센터 사이 거리를 요즘 청주에선 운리단길이라 부른다. 한적한 주택가 사이사이 감각 있고 개성 넘치는 카페와 맛집, 공방, 옷집, 문구점, 책방 등이 모여 있어 골목을 걷는 재미가 넘친다.
컴포트커피는 운리단길에서 ‘인생 타르트’를 만나게 해주는 카페다. 골목길 작은 카페인데 빈자리가 생길 틈이 없다. 타르트는 계절마다 달라지는데 부드러운 크림과 과일을 곁들인 메뉴를 커피와 함께 즐길 수 있다. 컴포트커피 맞은편엔 문구점 11포인트가 있다. 나무 진열장에 빼곡한 고급 색색 연필과 볼펜, 성냥, 수첩이 눈을 즐겁게 한다. 아기자기한 엽서와 기념품도 판다.
운리단길에서 카레 맛집으로 꼽히는 모녀식당과 붙어있는 여름서재는 가볍게 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카페에 갈 때 읽을 책 한 권 고르거나 운리단길의 감성을 즐기기에도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