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은 2017년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됐다. 공개 당시 외국에선 호평을 받으며 마니아층을 구축했지만, 국내에선 ‘범죄 인질극’이란 소재와 스페인 드라마라는 생소함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졌다. 유튜브 채널 ‘김시선’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시즌별로 5차례에 걸쳐 이 작품을 소개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점차 국내에도 입소문 나기 시작하더니, 지난해에는 ‘오늘 한국의 TOP 10’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그가 소개한 ‘종이의 집’ 영상 5편의 조회 수는 1536만회를 넘는다. 김시선이 ‘꼭 봐야 하는 넷플릭스 최고의 작품’이라고 추천한 미국 드라마 ‘마인드 헌터’, 체스 소재의 ‘퀸스 갬빗’도 같은 궤도를 통해 흥행한 ‘김시선 수혜주’로 꼽힌다.
이 남자가 소개하면 넷플릭스 순위가 바뀐다. 구독자 117만명을 보유한 유튜버 김시선(34) 얘기다. 넷플릭스뿐 아니다. tvN드라마 ‘방법’은 1년 전 종영된 드라마임에도 김시선 소개 이후 지난 1월 네이버 월간 다운로드 순위 9위에 올랐으며, 영화 ‘B급 며느리’는 독립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네이버 인기 순위 TOP 100 (38위)에 들었다.
어떨 때 그는 ‘출발! 비디오 여행’의 진행자 같다. 영화보다 영상을 더 재밌게 편집해 해당 작품을 꼭 보고 싶게 만든다. 영화관에서 GV(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는 영락없는 영화 평론가다. 가끔 기자의 영역도 넘나든다. ‘어느 가족’을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등을 인터뷰했다. 넷플릭스, 왓챠 등 볼 게 너무 많아진 세상에서 그를 찾는 사람은 더 다양해졌다. 최근엔 ‘오늘의 시선’이란 책을 냈다.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명함엔 ‘영화 말하고 쓰고 편집하는 인간’이라 적혀 있었다.
◇영화 얘기 하고플 때 편하게 찾는 사람
–유튜버부터 평론가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어떤 호칭이 좋은가.
“‘영화 친구' 김시선. 한번은 GV 제안이 왔길래 ‘좋은 평론가 많은데 왜 나를 쓰려고 하시냐’ 물은 적 있다. 그분 말씀이 평론가라는 직함이 있으면 대중이 종종 오해를 한다는 거다. ‘이거 뭔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하고. 영화 얘기하고 싶을 때 편하게 찾는 사람이고 싶다.”
–영화 ‘기생충’ 때 스타 평론가 이동진의 한 줄 평(‘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 논란이 생각난다. 어렵다, 잘난 체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반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들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전통적인 평론가들이 곱셈과 나눗셈을 한다면, 나는 덧셈과 뺄셈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튜브는 일종의 ‘영상 비평’을 하는 것이다. 글은 이해가 안 되면 무슨 뜻인지 다시 읽어보고 되새김질할 수 있지만, 영상은 그게 어렵다. 한번 들었을 때 빠르게 흡수하는 단어, 이미지가 그려지는 단어를 쓰려고 노력한다. 항상 국어 사전을 펼쳐 놓고 있다.”
–영화 관련 학교도, 직장도 다닌 적 없다. 어떻게 영화를 업으로 삼게 됐나.
“원래 전공은 코딩이다. 영화 ‘매트릭스’만큼은 기가 막히게 해석할 자신 있다(웃음). 대학교 3학년 때 한 대기업에서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한 인턴을 했다. 항상 회사 불은 제일 먼저 켜고 들어갔는데, 정작 사무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거다. 인턴 동기들한테도 영화 추천만 해주고···. 그때 알았다.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겠구나.’”
–영화와 관련된 첫 직업이 GV였다. 어떻게 하게 됐나.
“775분짜리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영화학 교수님, 영화학도, 영화 관계자. 영화를 보고 나면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게 생긴다. ‘아, 이걸 이겨냈구나. 함께 제국을 평정했구나!’ 하는 느낌. 영화제도 결국 오는 사람들이 비슷하다. 서로 어디서 뭐 하는지 모르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건 안다. 이런 사람들이 알음알음 영화 관련된 일들을 소개해줬다.”
–생계 유지가 가능했나.
“내가 좋아하는 일 하니까, 최저 생계비로 살아도 행복했다.”
–부모님 반응은?
“욕 하시지, 바로(웃음). ‘그 껌껌한 데서 도대체 뭘 하냐’고 많이 물어보셨다. 영화관 한번 들어가면 연락이 안 되니까. 하루에 영화를 3편씩 봤다. 아침에 한 편, 점심 먹고 오후 2시쯤 한 편, 나와서 핫도그 하나 먹고 또 한 편. 영화관에서 나오면 밤이었다.”
◇체스 드라마 위해 직접 체스 배웠다
–유튜브는 어떻게 하게 됐나.
“블루레이(디스크)를 오랫동안 모았는데, 처음엔 이걸 공개하는 영상을 찍었다. 한 3~4개월을 블루레이 언박싱(개봉)만 했는데, 다른 영화 유튜버가 영화 소개를 하면 어떠냐고 하더라.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유튜브는 뷰티, 게임, 키즈 정도밖에 콘텐츠가 없었다. 여럿이 해야 이 분야도 커지니까, 같이 파이를 키워보자는 거였다. 2015년 첫 영상을 올렸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한 달에 6만원 정도 수익이 나왔다(웃음).”
그는 “현재 수입은 공개하기 어렵지만 직원들 보너스 주고, 영화표 걱정 없이 영화를 맘껏 볼 정도는 된다”고 했다.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 실제 영상이 올라오기까지 최대 7~8주가 걸린다. 예전엔 다 혼자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영상 편집하는 직원이 따로 있다. 어떤 장면을 넣고, 그 영상에 무슨 멘트가 들어갈지는 다 내가 구상한다. 저작권은 당연히 동의를 구한 것이다. 영상을 만든 후에는 창작자들에게 보여준다.”
–왜 보여주나.
“감독이 봤을 때 내가 분석한 내용이 관객들의 상상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다. 가끔 ‘이렇게 안 알려줄 거면 영상 만들지 말라’ ‘결말 왜 안 써주냐’고 악플다는 분들도 있는데,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직접 이 작품을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영상 편집할 때도 작품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장면들을 선택하되, 정말 핵심적인 장면이나 직접 봐야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뺀다.”
–구독자가 117만명이다. 인기 있는 이유가 뭘까.
“넷플릭스나 왓챠에 한 해 수천 편의 작품이 쏟아진다. 시간이 부족해서, 바빠서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에 대해 ‘이걸 내가 직접 보면 얼마나 재밌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려고 한다.”
–예를 들면.
“체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 ‘퀸스 갬빗’을 소개할 땐 직접 체스를 배웠다. ‘체스닷컴’이라는 전 세계 4000만명 정도가 이용하는 유명 웹사이트가 있는데, 여기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 직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퀸스 갬빗을 성장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안에서 펼쳐지는 체스 경기들이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다. 이를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밌어진다. ‘마인드헌터’는 프로파일러가 주인공인 실화 소재 드라마다. 드라마 실제 모델인 존 더글라스에 대해 조사하는 직원을 따로 뒀다. 당시 마인드헌터는 1화만 보고 어렵다고 포기하는 시청자가 많았는데, 배경을 알고 보니 끝까지 볼 수 있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좋은 작품을 고르는 비결이 있나.
“보통 사람들이 영화제에 가면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데, 영화제의 백미는 똥을 밟는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작품만 골라서 보고 싶어하는데,그러면 자기 취향을 알기 어렵다. 누구나 좋아하는 작품은 내 취향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남들이 ‘이 영화 별로다’ 했는데 막상 나는 좋을 수 있다. 작품이 안 좋았다면 ‘나는 이런 걸 안 좋아하는구나’를 알아가면서 나만의 작품 보는 눈이 생기게 된다.”
–이번 주말 볼만한 영화 한 편과 넷플릭스 시리즈를 추천한다면.
“영화는 이승원 감독의 ‘세 자매’(지난 1월 개봉·VOD로 관람 가능). 이 영화는 꼭 가족들끼리 봤으면 좋겠다. 사실 다른 누구보다도 상처를 많이 주고받는 게 가족 아닌가. 가족 간의 사과가 얼마나 힘든지, 그렇지만 그게 왜 필요한지 유쾌하지만 깊게 파고드는 영화다. 넷플릭스는 다큐멘터리 ‘스피드 큐브의 천재들’을 추천한다. 스포츠맨십을 굉장히 담백하게 다뤘다. 나는 보고 울었다.”
이번 주, 넷플릭스와 VOD 순위가 또 한번 바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