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내가 미나리와 빈번히 마주쳤다는 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신문을 보다 리 아이삭 정이 만든 영화 ‘미나리’에 대한 기사를 읽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에 미나리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는 거야 안 나온다는 거야?’ 미나리 밭에 서 있는 인물들을 찍은 포스터 때문에 더 궁금했다. 그런데 책을 보는데 미나리가 나왔고, 티비를 틀었는데 또 미나리가 나왔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으신가요? 하루 종일 미나리가 흐르는 이상한 날이었다.

영화 ‘미나리’에서의 미나리가 상징이기만 한 건지 실제로 미나리를 키우는 장면이 나오는지도 궁금해졌다. 미나리를 키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봤던 책에 미나리를 키우는 장면이 나와서 그렇다. 박완서 선생의 따님인 호원숙 작가가 어머니의 부엌에 대해 쓴 책인데 이런 부분이 있다. “어머니는 다듬고 난 미나리 뿌리를 버리지 않고 예쁜 항아리에 물을 받아 담가두셨지. 그게 다시 잎이 올라와 겨울의 방 안을 연두색으로 생기 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끊어서 먹기도 했다.”

사진은 원동 미나리 수확 장면.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유칼립투스나 루스커스 같은 초록 잎사귀를 돈을 주고 사서 화병에 꽂기도 하면서 미나리를 꽂을 생각을 못 하다니. 이렇게나 창의성이 없다니. 나는 당장 미나리가 사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뿌리가 달려 있는, 흙도 달려 있을, 어쩌면 거머리도 붙어 있을 미나리. 뿌리를 물에 담가두면 다시 미나리가 삐죽빼죽 돋아나올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고양이를 먹인다고 키우는 캣닙(깻잎 아니고 캣닙입니다.) 같으려나? 친구가 보내준 사진 속의 캣닙의 끝에는 물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는데, 미나리도 그러려나? 이런 건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런 미나리는 없었다. 동네 슈퍼의 미나리에는 뿌리가 달려 있지 않았다. ‘어디 가면 뿌리가 달린 미나리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아, 미나리꽝!’이라는 자문자답에 이르렀다.

맥 빠진 자문자답이다. 요즘 시대에 어디에서 미나리꽝을 볼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미나리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런 단어들이 있다. 들어본 적은 있으나 써본 적은 없고, 어떻게 쓰이는지 짐작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뜻이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건 사전에서 정한 대로 차렷 자세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는 미나리꽝이 그런 단어였다.

미나리꽝… 미나리꽝… 그게 뭘까? 내가 알기에 미나리꽝 말고는 ‘꽝’이라는 접미사가 붙은 단어는 없다.(자신이 없네요.) 접미사는 물론이고 꽝으로 시작하는 단어도 없다. 미나리를 키우는 곳 정도로 어림짐작 할 뿐이지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미나리를 키우는 밭? 미나리를 키우는 늪 같은 곳? 그게 어디든 어느 형태든 미나리를 키우는 모든 곳을 부르는 명칭? 아니면 이 모든 것?

처음으로 사전을 찾아보았다. “미나리를 심는 논. 땅이 걸고 물이 많이 괴는 곳이 좋다.”라는데… 더 모르겠다. 그러면 미나리를 밭에 심는 데는 미나리꽝이 아닌 건가? 검색을 할수록 미궁에 빠졌다. 유튜브로도 검색했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 달랐기 때문이다. 구정물 같은 데서 미나리를 건져 올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고, 하우스 같은 데서 미나리를 캐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문제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미나리를 채취하는 작업장의 부엌, 한 아주머니가 홍어를 무치고 계셨다. 고춧가루와 간장, 마늘 같은 한국식의 가진 양념들로 홍어를 쓱싹쓱싹 버무리던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는요, 미나리 먹으려고 홍어를 먹어요.”라고. 홍어 무침에 미나리를 투하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렇게 미나리와 함께 무친 홍어무침 옆에는 미나리가 잔뜩 쌓여 있었고, 급기야는 소주를 따는 장면이!

차오른 미나리욕(慾)을 해소하기 위해 소주를 한 병 사왔다. 미나리전에 곁들였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미나리와 소주가 나오는 시집을 펼쳤다. 시의 제목은 ‘미나리꽝 키우는 시인’. 김승희 시인의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에 있다. 그런데, 기억과 달리 소주는 없었다. 술은 있는데 소주는 아니었다. 약간만 인용해본다. “미나리꽝은 차가운 물속에 있고 / 얼음 속에서 맨손으로 일을 하니까 / 팔 어깨가 다 녹는다고 한다 / 술에 취해야만 일할 수 있다 / 술이건 무엇에든 취해서 추운 물속에서 미나리를 키운다.” 술에 취해야만 일할 수 있다는 구절을 보고 당연히 소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를 다시 보니 더더욱 이 술은 소주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 속에서 맨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녹여주고, 팔도 주물러주고, 또 취하게 할 술로 소주만한 게 또 있을까? 그리고 소주는 독하고도 맑으니까, 쓰면서 또 달콤하니까. 미나리와 딱이다. 참을 수 없이 이 푸릇푸릇한 미나리가 먹고 싶어졌고, 난생처음으로 홍어를 주문했다. 물론 미나리를 먹기 위해서. 미나리를 먹겠다고, 또 소주와 먹겠다고, 내 손으로 홍어무침을 만들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꽤나 많은 잔칫집에 따라다녔던 유년 시절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홍어무침이었다. 절여서 식감이 달라진 무와 오이, 알싸한 도라지 사이에 숨어 있던 홍어의 맛은 그때까지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소주였다. 홍어무침은 밥반찬보다는 소주 안주로 적합한 음식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홍어무침에 소주를 먹는 어른들을, ‘크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드는 어른들을 구경하며 내가 소주를 먹게 되려면 얼마나 지나야 할지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소주의 맛이란 어떤 맛일지에 대해서도.

그들을 생각하며 홍어를 무쳤다. 홍어무침에 소주를 먹던 어른들과 미나리꽝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또 소주의 맛을 궁금해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며. 제대로 차오른 미나리욕(欲)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는 이런 일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소주를 한 병 사왔다. 이게 다 미나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