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이제야 양심선언 한다. 중학 시절 내가 열심히 교회에 다녔던 이유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등부 퀸카이자 장로님 딸이었던 진희, 진희 때문이었다. 진희는 수영선수로 또래보다 키는 한 뼘 정도 컸고 목소리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상냥했다. 우리 교회 머슴애 가운데 진희를 좋아하지 않은 자, 몇이나 됐을까.

그런 가운데 내가 선택받은 1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탄 예배 무렵. 모두 고개 숙여 기도하던 그 시각에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진희 쪽을 힐끔 봤는데, 진희도 말똥히 눈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몰래 먹다 들킨 사람처럼 진희는 얼른 고개를 돌렸고, 나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예수를 목격한 양 찌릿 전율을 느꼈다. 할렐루야! 내 인생에 그린 라이트가 밝았구나.

그날 이후 내가 맹렬히 기다린 날은 2월 14일. 일 년에 단 한 번, 고백의 상규를 깨고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한다는 그날, 드디어 나는 진희의 고백을 받고 모태 솔로에서 탈출하는 것은 물론, 수컷 무리 가운데 제왕이 되었음을 세상에 자랑할 수 있겠다고 밤마다 이불깃을 물어뜯으며 즐거워했다. 이효리 남편 이상순으로 살아가는 기분을 그때 나는 진즉 알았다. 1988년 2월 14일, 운명의 날은 그렇게 찾아왔다.

때마침 일요일이었다. 진희는 커다란 제과점 종이가방을 들고 교회에 나타났다. 평소에도 지루하던 예배 시간이 족히 1세기는 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느껴졌던 그날, 눈길은 자꾸 진희가 가져온 종이가방 쪽으로만 기울었다. 적당히 고백해도 되는 것을, 나를 위해 어쩜 저리 큼직한 초콜릿을 준비했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예배가 끝나자 여자애들은 각자 준비한 초콜릿을 평소 좋아한 남자애들에게 던지듯 건네주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쳤고, 나는 신발 앞코로 땅바닥을 툭툭 치며 진희를 기다렸다. 종이가방을 끌어안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던 진희. 10미터, 5미터, 3미터…. 그러다 진희는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더니 조그맣게 포장된 초콜릿을 남자애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영웅아, 안녕. 밸런타인데이 축하해.” “영탁아, 샬롬. 너는 과연 멋진 친구야.” 우리 교회 웬만한 남학생에게 골고루 하나씩, 빈곤국에 파견된 월드비전 활동가가 긴급구호품 나눠주듯, 초콜릿을 돌렸다. 나만 빼고,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다.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신앙심은 급격히 퇴색했고, 어머니께 근처에 괜찮은 사찰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라 잃은 백성처럼 대엿새는 통곡하였으리라. 그리고 나는 설욕을 다짐했다. 디데이는 3월 14일. 이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을 고백한다는 그날, 진희에게 안겨주리라. 영혼까지 끌어모아, 용돈을 탈탈 털어 사탕을 구입했다. 라면 상자 하나 분량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 많은 사탕을 낑낑거리며 교회에 들고 가서는, 이번에는 어느 도지사가 재난지원금 뿌려주는 모양으로 여자아이들에게 평등한 화이트데이를 선물했다. 자매님, 축복 받으세요. 사랑의 3월이에요. 가은아, 혜연아, 여기 사탕 받아. 아, 물론 진희만 빼고.

벌써 30년도 지난 이야기. 지금은 편의점 주인장으로 살아가며 매년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가 돌아올 때마다 진희를 떠올린다. 곰 인형 진열하며 진희 얼굴 그려보고, 초콜릿 세트 무더기로 구입하는 손님 맞을 때마다 그날 진희 미소 생각하고, 팔지 못한 초콜릿을 본사에 반품할 때마다 진희를 잊지 않는다. 진희, 고 맹랑한 진희. 결혼은 했겠지?

직장인들은 매년 새해 달력 나오면 ‘빨간 날’이 얼마나 되나 세어본다는데 직장가(街) 편의점 점주들은 2월 14일, 3월 14일, 11월 11일이 대체 무슨 요일에 끼었나, 습관처럼 그것부터 확인한다. 편의점 3대 명절이 바로 그날. 유래가 뭐라든, 상술이 어떻든, 우리에겐 고맙기만 한 날이다. 초콜릿으로, 사탕으로, 막대 과자로, 평소보다 매출이 곱절은 뛰어오른다. 그런 3대 명절이 모두 빨간 날에 들어 있으면 좌절의 해가 되는 것이고, 모두 평일이면 할렐루야! 국운(國運) 상승의 해처럼 여긴다.

올해는 설 연휴에 일요일, 코로나19까지 겹쳐 밸런타인데이 특수는 조금도 누리지 못했다. 그득 쌓인 초콜릿 진열대 옆 멀뚱히 앉은 곰 인형을 툭툭 치며 나는 또 엉뚱하게 진희를 원망했다. 올해는 화이트데이까지 빨간 날이라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지만, 화이트데이 다음 날 월요일의 인류애라도 살짝 기대해보련다. 어쨌든 매년 이렇게 초콜릿과 사탕 선물세트 팔아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모쪼록 그날만큼은 진희처럼 사해동포주의에 충만한 여성들이 늘어나길, 나처럼 앙갚음에 불타올라 평등 사탕 뿌려대는 남성들이 증가하길,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간절히 비나이다. 그리고 꼭 하나 알아둘 사항. 열다섯 머슴애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사탕이 쏟아지는 법이더라. 아, 남자의 순정! 유리잔처럼 조심히 다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