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자리한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 건물에 고 박원순 서울 시장 피소 사실 유출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어있다. /남정미 기자

“여성 단체는 정치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에 있어 가해자와의 함께하기를 택했다.”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건물 앞에 이런 내용을 담은 대자보가 2장 붙었다. 자신을 여성 단체 막내 활동가로 소개한 글쓴이는 “12월 30일 자 검찰 발표는 내게 현실을 들이밀었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서울북부지검은 고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내용이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박 전 시장 측에 흘러들어 간 과정에 여연 김영순 대표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가 있다고 했다. 남 의원은 여연 대표를 지냈고, 임 특보는 남 의원 보좌관 출신이다. 피해자 측에서 박 전 시장을 미투 사건으로 고소할 예정이라고 전달 받은 여연 대표가 남 의원에게 관련 사실을 전달했고, 남 의원이 임 특보에게 전화로 ‘박 시장 관련 불미스러운 얘기가 도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느냐’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임 특보에게 이야기를 전달 받은 박 전 시장은 ‘이 파고는 내가 넘기 힘들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남긴 뒤 사라져 숨진 채 발견됐다.

여연은 검찰 발표 당일 “피해자와 지원 단체에 대한 2차 가해, 사건 본질의 왜곡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해당 내용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파장, 사건에 대한 영향 등을 고려하여 바로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고 했다. 검찰 발표 전에 이미 대략의 유출 경로를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침묵했다는 얘기다.

남인순 의원도 지난 5일에야 “피소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유출한 바 없다. 다만 서울시 젠더특보에게 전화로 ‘박원순 시장 관련 불미스러운 얘기가 도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라고 해명했다. 남 의원은 사건 당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부르자고 주도한 민주당 인사 중 하나로도 알려졌다.

뒤늦은 해명과 부인에 “질문과 유출은 대체 무엇이 다르냐”(정의당), “담배는 피웠지만 담배 연기는 마시지 않았다는 뜻”(김재련 변호사), “피해자의 첫발은 국가 시스템의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이른바 ‘박원순 사람들’ 즉 인맥이라는 밧줄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등 비난이 쏟아졌다.

한때 한국 여성 권익 신장의 산파 역할을 했던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어쩌다 권력 편에 선 반(反)여성적 집단이라는 비판과 마주하게 됐을까.

그래픽=김의균

◇여연은 정계 진출 회전문?

1987년 결성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30년의 세월을 지내오며 국내 최대 여성운동 단체로 자리 잡았다. 여성계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고 여성 인권 3법이라 불리는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성 총리, 국회의원들도 대거 배출해 여성의 정치 세력화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역대 여연 출신 회장과 대표 등 10여명이 민주당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거나 장관을 지냈다. 초대 여성부 장관이자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한명숙을 포함해 지은희, 정현백 등 3명의 여성가족부(여성부) 장관이 여연에서 나왔다. 이우정, 이미경, 김희선, 이경숙, 남인순, 박선숙, 권미혁, 정춘숙 등 국회의원도 여럿 나왔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은 지난 6일 성명을 내고 “여성 단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고 공직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여세연은 “그러나 남성이 지배하는 정치에서 생존하고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정치에 진입하기 전에 가졌던 페미니스트로서의 문제의식을 잊어버리고, 여성 단체들의 문제 제기를 외면하고, 남성 정치에 편입하는 방법을 택한 것은 아닌지,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 여성 단체 경력이나 여성 대표성의 척박한 현실을 이용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여성 단체 출신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성찰을 요구한다”고 했다. “86세대 남성들이 현재 한국 사회의 권력 집단이 되는 과정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을 포함해 86세대 여성들 또한 그 권력의 일부가 되었다”고도 했다.

2030 여성이 주축이 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도 지난달 30일 논평에서 “이번 사건으로 십수 년간 여성 단체 대표 경력으로 민주당 비례선거에 영입되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그렇게 형성된 인맥이 여성주의 사회 견인을 위한 정치적 과제 수행의 임무보다 인맥 진영 구축에 이용된 결과를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등의 책을 쓴 1세대 페미니스트 이영희(필명 오세라비)씨는 “지금 여연은 비례대표로 정계에 진출하는 회전문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에는 이 사람이 들어가겠구나’ 하고 찍어보면 틀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씨는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한 여연은 이미 정치 이익 단체고 압력 단체”라며 “보통 여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그들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당파적으로 ‘선택적 분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선택적으로 분노한다

여연의 ‘선택적 분노’의 역사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반라(半裸)의 여배우 몸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 얼굴을 합성한 패러디 사진이 게재된 일이 있었다. 평범한 여성들의 분노와 달리 여연은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언론과 시민 비판이 쏟아지자 일주일 만에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잘못된 정치 패러디”라는 성명을 냈다. 성명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선 “‘이를 흔한 정치 패러디의 하나로 간주해야 하느냐 여성 비하로 봐야 하느냐'라는 시각에서 회원 단체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해명했다. 2012년 홍성담 화백이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출산하는 그림을 그렸을 때도 여연은 조용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논란이 있었지만, ‘선택적 분노’에 다시 불을 지핀 건 2018년 미투 사건 때다. 친문(親文) 이윤택 연출가의 극단원 상습 성추행 사실이 알려졌을 때, 여연은 일주일 가까이 침묵하다 뒤늦게 여론에 떠밀리듯 성명을 냈다. 2019년 조국 전 법무장관 자택을 압수 수색한 여검사에 대해 친문(親文) 네티즌들의 도를 넘는 외모 비하와 인신공격이 이어졌지만, 여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2017년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자서전에 ‘대학 시절 친구가 돼지발정제로 여성을 해하려 한 일이 있었다’고 쓴 사실이 알려졌을 땐 즉각 사퇴 성명을 내고, 거리 시위를 했다. 2019년엔 고(故)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인’을 자처하며 억대 후원금을 모금하고 캐나다로 도피한 윤지오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시위를 벌인 여성 단체도 여연이다.

여연 앞에 대자보를 붙인 막내 활동가는 마지막 대목에 이렇게 썼다. “여기까지 걸어오게 된 당신의 발자취는 당신들의 썩어 문드러진 조직 문화가 이끄는 방향 그대로 걸어온 것의 결과이다. 지금 상황은 당신들 운동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더 이상 피해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조직의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정치권과 결탁 없는 운동을 이어나갈 것을 촉구한다.”

본지는 남인순 의원과 김영순 대표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