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고, 운동하고 책 보면서 다시 주식 시장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최웅필(48) 전 KB자산운용 상무는 이른바 여의도 증권가의 잘나가는 ‘스타 펀드매니저’였다. 스물일곱 살이던 1999년 증권가에 발을 들였고, 남다른 주식 안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승승장구했다. 그가 2009년 내놓은 펀드(KB밸류포커스펀드)에는 한때 3조원에 이르는 돈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2015년부터 증시에 비해 수익률이 나빠지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펀드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돈을 빼가더니 현재 펀드에 남아 있는 돈은 6000억여원으로 줄었다. 최 전 상무는 “펀드에 돈이 몰리고 수익률이 좋을 땐 나를 추켜세우며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는데, 실적이 나빠지니 여기저기서 말이 나왔다”고 했다. 결국 지난 10월, 그는 여의도를 떠났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스타매니저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연말 우리 증시(코스피)가 사상 처음으로 2800을 뚫는 등 호황을 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왜 여의도를 떠나는 걸까.
◇주식형 펀드 악화로 점점 설 자리 잃어
이달 초, 한 스타매니저의 퇴사로 여의도 증권가가 술렁였다. 이채원 전 한국밸류운용 사장(56)은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철강·화학처럼 기업의 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싼 주식(가치주)을 골라 투자해 주가가 오르면 팔아 수익을 남겼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 그가 운용해 온 펀드는 1400%가량 수익(누적)이 났다. 그가 만든 ‘한국밸류10년투자1’에는 한때 1조5000억원이 넘는 돈이 몰려들었다. 수익이 좋고 돈이 모이자 버핏이란 별칭이 붙었고, 회사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3년 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이 펀드의 수익률은 연초 대비 –3.2%를 기록했다. 결국 지난 9일 사표를 던졌다. 그는 본지 통화에서 “4~5년 정도 부진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후배에게 기회를 줘야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사람을 짓누르는 느낌이다. 고객의 소중한 돈을 굴린다는 것의 무게를 느꼈다”고 했다.
마이다스에셋운용 주식운용본부장으로 있었던 이하윤씨는 지난 8월 회사를 떠났다. 올해 마흔한 살로, 네이버나 카카오 등 잘 오르는 주식을 골라 펀드에 담아 여의도 증권가에선 그를 ‘작두 타는 매니저’라고 불렀다. 그가 운용하던 펀드는 한때 규모가 총 9000억여원에 이르렀고, 2015년부터 운용하던 ‘마이다스 미소 중·소형주 펀드’는 최근 1년 수익률이 60%나 됐다. 그럼에도 그는 공모펀드가 아닌 다른 형태의 투자를 하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이 본부장은 “내 경우 수익률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직장인으로 받아가는 보상에 한계를 느꼈고, 공모펀드 시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KB자산운용을 떠난 최웅필 전 상무는 “나는 유망한 주식에 오랜 기간 투자해 왔는데,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극 대응하지 못해 카카오나 네이버처럼 좋은 주식을 담지 못한 면도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쑥쑥' 오르는데, 펀드는 ‘느릿'
스타매니저가 여의도 바닥을 떠나는 것은 과거만큼 주식형 공모펀드(불특정 다수로부터 투자를 받은 뒤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로 큰돈이 몰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주식형 펀드로 들어와 있는 자금(설정액)은 2011년 약 67조원(12월 21일 기준)에 달했다. 그러나 차츰 감소해, 올해 12월 현재 약 39조원으로 줄었다. 투자자가 맡긴 돈이 1조원이 넘는 대형펀드(ETF 제외)는 2011년 11개나 됐는데, 올해는 단 1개에 불과하다. 이하윤 전 본부장은 “매니저가 인정받으려면 1000억원 정도는 넘는 펀드를 굴리고 수익을 내야 가능한데, 100억~200억원 수준으로 펀드 규모가 줄어버리면 인정받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펀드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이유는 수익률이 예전만 못하다고 투자자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카카오(100% 상승)나 네이버(50%), 삼성전자(50%)와 같은 우량 주식들이 연초에 비해 크게 오르고, 셀트리온헬스케어처럼 200% 이상 대박을 터뜨린 주식이 있는 데 반해, 올 들어 이달 9일까지 국내 주식형펀드 평균 수익률은 25% 수준이다. 김승규 미래에셋자산운용 팀장은 “당장 눈앞에 주식이 오르는 게 보이다 보니 투자자들이 펀드매니저에게 돈을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개인 투자자들은 펀드를 깨고, 직접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증시 투자자(외국인·기관·개인) 가운데 개인의 비중은 2013년 59%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76%까지 올랐다.
‘코스피200′이나 ‘코스피50′처럼 특정 지수에 연동해 수익률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 ETF(상장지수펀드) 등으로 몰리는 점도 스타 매니저들의 영역을 좁히고 있다. 주식형펀드 잔고가 67조(2011년)원에서 39조원(올해)으로 줄어드는 동안 ETF의 잔고는 5조4000억원에서 27조원으로 늘었다. 황성민 삼성자산운용 팀장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증시가 꾸준한 상승세에 있기 때문에 그 상승세에 맞춰 연동된 상품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을 투자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 매니저 힘 쓸 날 다시 올까?
스타매니저의 앞날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이채원 전 한국밸류운용 사장은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시장이 좋기 때문에 당장은 매니저들의 영역이 줄어들었지만, 어차피 주식 시장이라는 게 주기별로 흐름을 타게 돼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스타 매니저가 다시 힘을 쓸 날이 올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도 “지금은 시장이 좋지만, 나중에 파도가 치는 국면에 들어가다 보면, 전문가가 우량 종목에 골라 투자한 종목이 안정적이겠구나 하는 판단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하윤 전 마디다스에셋 본부장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매니저의 능력보다는 ETF처럼 지수에 연동된 상품이 각광을 받고 있어서 주식형 펀드로 돈이 몰리지 않는 형국”이라며 “내 후배 세대에서는 스타 매니저가 더더욱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웅필 전 KB자산운용 상무는 “과거처럼 화려했던 시절이 올지는 모르겠다”며 “급변하는 산업이나 시장 동향을 빨리 캐치해 고객들이 만족할 만한 펀드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의 등장이 변수가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미 국내 일부 자산운용사는 AI를 도입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과 삼성자산운용이 AI가 각각 100%와 30%씩 관여하는 ETF를 지난 9월에 각각 출시했다. AI는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업의 가치를 분석해 투자 종목을 추려낸다. 두 상품 모두 지금까지 약 17% 수익률을 올렸다. 이는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수익률(18%)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AI를 투자에 도입하는 것은 초기지만, 향후 바둑의 알파고처럼 성장하는 날도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