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 교부 불가.”
지난 17일 서울 마포의 기업은행 지점 정문과 창구마다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 지점에 설치된 ATM 기기 화면에도 모두 ‘5만원권은 출금이 안 된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현금 수천만원이 급하게 필요해 은행을 찾았다는 김모씨는 창구 직원과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 결국 쇼핑백 두 개에 1만원권을 가득 담고 떠났다.
기자가 5만원권 지급이 어려운 이유를 묻자 창구 직원은 “한국은행에서 5만원권을 내려보내 주지 않아서 지점마다 바닥난 상태”라며 “국책 은행인 기업은행이 이 정도면 아마 다른 시중은행들의 5만원권 수급 상황은 비슷하거나 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이날 서울 광화문, 마포, 여의도 등 도심 일대 시중은행 지점 15곳을 둘러보니 8곳에서 비슷하게 5만원권 지급이 어렵거나 ATM 기기에서 5만원권 출금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울뿐 아니라 다른 지역도 5만원권이 귀하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농촌 지역에선 아직도 현금 결제를 선호하는 고객이 많은데,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된 올해 초부터 이미 여러 지역 지점에서 5만원권이 동나 비명을 질렀다”고 말했다. 일부 시중은행 지점은 ‘한국은행이 5만원권 발행을 중단해서 지급이 어렵다’는 취지의 안내문을 내붙였다가 한국은행에서 “발행 중단한 적 없다”고 해명에 나서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5만원권 지폐는 총 16조5827억원가량 발행됐다. 이 동안 시중은행 등을 거쳐 한국은행으로 돌아온 5만원권은 4조9144억원에 불과했다. 환수율 29.6%. 같은 기간 1만원권 환수율(67.7%), 5000원권 환수율(99.7%)보다 크게 낮았다. 게다가 작년보다 5만원권 발행액은 2000억원가량 더 많았는데도 작년 환수율(60.1%)보다 크게 낮은 상황이다.
환수율이 이렇게 낮다는 건 시중에 풀린 5만원권 10장 중 약 7장이 개인이나 기업 수중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로 민간의 고액권 수요가 높아지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며 “불확실성이 높아진 데다 우리나라에선 부동산 투자도 묶여 있고 주식 투자도 위험하다 보니 가장 안전한 현금을 보유하려는 심리가 커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세계와 갤러리아 백화점의 올해 가정용 금고 매출도 예년에 비해 20~30%가량 늘어났다.
문제는 시중에 ‘잠겨 있는’ 5만원권이 비자금이나 탈세 등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2009년 5만원권 발행이 시작된 이래 꾸준히 지적돼 온 문제다. 대표적 사례가 2011년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5만원권 다발이 110억원어치나 발견된 이른바 ‘마늘밭 5만원권 사건’이다. 이 돈은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던 일당이 은닉한 비자금이었다. 2013년 통합진보당 소속 이석기 전 의원이 내란 음모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 자택 신발장과 등산 가방 등에서 5만원권이 1억4000만원가량 나왔다. 최근 정-관계 로비 의혹으로 번진 ‘라임 사태’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도 서울의 한 물품 보관소에 55억원어치 5만원권 다발을 여행 가방 3개에 나눠 담아 은닉했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매년 국세청이 실시하는 고액 체납자 추징에선 집 안 구석구석 기발한 장소에서 5만원권 다발이 발견되는 게 일종의 연례행사처럼 여겨질 정도다. 각종 대여 금고는 기본이고, 골프장 개인 사물함이나 거실 바닥, 싱크대 수납장, 여행 가방은 물론 장난감 인형에 5만원권으로 수천만원을 숨겨둔 사례도 있었다. 올해 국세청의 고액 체납자 추징 조사에선 서울 강남에서 영업 중인 변호사가 자기 집 서재에 5만원권 3600만원어치를 숨겨놓은 게 들통났다.
연세대 경제학과 성태윤 교수는 “지금까지 풀린 5만원권이 약 220조원인데, 총환수율은 50% 정도”라며 “100조원이 넘는 돈이 시중에 돌지 않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는 셈인데, 이 자체만으로도 경제적 손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