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원로 배우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최근 몇 년 뜸했는데, 암과 싸웠다고 하더군요. 항암 치료 23회에 수술 두 차례. 투병의 괴로움을 전했지만,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약해지려 할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한 아내를 ‘악녀’로 호칭하면서도, 그때의 강세 하나, 어조 하나마다 무한한 감사가 녹아 있었습니다.

노부부가 함께 고마워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미스터 트롯’입니다. 밤 9시 취침, 새벽 5시 기상 습관을 지닌 남편은 처음에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1만8000보를 걸어야 하는데, 왜 자정까지 TV를 보고 앉아 있는가. 고함을 지르자, 더 큰 고함이 나왔다죠. 삼시 세끼 집밥에, 당신 병 간호에, 나도 좀 살자! 그렇게 입문한 트롯. ‘뽕짝’으로 무시하던 고정관념은 휘발하고, 이제는 재방송 틀어주는 채널 번호까지 암기하고 있었습니다. 임영웅 영탁 이찬원 장민호 정동원 등의 이름을 줄줄 꿰며 ‘은인’이라 간증하더군요.

같은 날 저녁에는 친한 국문과 교수와 소주 한잔을 했습니다. 오래된 사이지만 올해 좀 뜸했는데, 역시 암과 관련한 사연이 있더군요. 모친의 혈액암 투병으로 결혼 안 한 자신이 병수발을 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중년이 되었지만 청년 시절의 그는 로커. 이 장르와는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사람이었는데, 1년 만에 트롯 전도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늙고 아픈 어머니의 유일한 위로는 ‘미스터 트롯’이었다는 것.

트롯맨의 너무 잦은 노출과 비슷한 프로그램의 양산으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청자가 적지 않습니다. 제작진이 새겨들어야 할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점심과 저녁의 간증을 들으며, 건강한 사람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실을 새삼 절감합니다. 몸과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트롯맨과 노래가 주는 위안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하루 300명을 훌쩍 넘긴 코로나 신규 확진자, ‘공수래 풀수거’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스님, 모텔방에서 전세 살라는 부동산 대책, 부산 시장 성추행 뒷감당에 국민 보고 10조원을 내라는 정부... ‘미스터 트롯’의 과도한 반복에 일순 불편하면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나마 이 소음과 공해를 달래주는 유일한 위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아찔한 주말입니다. 코로나 3차 대유행, 다들 잘 이겨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