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쓰는 사람도 없고, 모든 회식 자리는 전원 출석하는 분위기예요.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1년 중 가장 열심히 일하는 때 아닐까요(웃음).”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A(43)씨가 전하는 요즘 사무실 풍경이다.
직장인의 성적표, ‘인사 평가’ 시즌이 한창이다. 10월 중·하순부터 11~12월은 대부분 기업에서 직원들의 한 해 성과를 평가하는 시기. 찬 바람 불어오는 이맘때 사무실 공기도 냉랭해진다.
피평가자가 좋은 고과를 받는 노하우, 평가자가 지켜야 할 원칙은 뭘까. ‘아무튼, 주말’이 신입 사원, 중간 관리자, 임원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인터뷰에 응한 직장인들은 속마음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조건으로 모두 익명을 원했다.
◇평가는 ‘짬밥’순?
최근 모 기업에서 사달이 났다. 부서장이 업무 성과와 상관없이 연차에 따라 위부터 높은 고과를 준 사실이 들통난 것. 공개 금지인 고과를 사석에서 발설한 게 화근이었다. 연차 낮은 직원들이 부서장에게 단체로 반발했다.
연차 낮은 회사원들은 “짬밥(연차를 뜻하는 은어)순 고과”를 인사 평가에서 가장 불합리한 부분으로 꼽았다. “팀장이 임원과의 고과 결정 회의에서 ‘우리 팀 누가 내년에 꼭 승진을 해야 하니 최고 등급을 달라. 대신 우리 팀에서 최하 등급을 하나 더 가져가겠다’는 식으로 설득한다더라. 결국 최하 등급은 막내 몫 아니겠는가.” 2년 차 대기업 직원 B(27)씨의 하소연이다. 3년 차 자동차 회사 직원 C(27)씨도 “승진 대상자에게 좋은 고과를 몰아주는 관행을 없애자는 차원에서 올해부터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는데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승진을 앞둔 사람이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은 고과를 받는다"고 했다.
상사들도 일부 인정한다. 모 대기업 D(50) 부사장은 “한국 기업 문화에서 ‘짬밥’은 어쩔 수 없는 중력(重力)인 게 사실이지만, 절대평가가 많아져 연차가 적다고 해서 무조건 불리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유통회사 E(47) 부장은 “내신 관리를 잘못 하면 막판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학 지원 자체를 못 할 수 있다. 신입 사원이라 한계를 느끼더라도 차곡차곡 자기 성과를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정동일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생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생 Z세대 통칭)는 성과 평가나 보상에서 ‘공정성’ ‘투명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인터넷에 비판 글을 올리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두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SK·LG 등 국내 100여 기업에 성과 관리 설루션을 제공한 휴먼솔루션그룹(HSG) 최철규 대표도 “승진 앞둔 직원에게 최고 고과를 주는 것을 업계 용어로 ‘돌려막기’라 한다. 최악의 관행”이라고 했다.
◇겸손보다는 뻔뻔?
“솔직하게 말할까, 뻔뻔하게 써야 할까.” 피평가자들의 공통 고민이었다. 평가자들은 대체로 “겸손보다는 뻔뻔”이라고 답했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 F 이사(46)는 “성과 보고서에 과유불급이란 없다. 낯간지러울 정도로 자세하게 쓰는 게 이득”이라고 했다. 그는 “1, 2, 3 번호를 매기고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성과를 작성하라”고 조언했다. 외국계 통신회사 G(43) 이사도 “과시인지 성과인지는 숫자와 백데이터(근거 자료)가 판가름한다.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근거가 있으면 성과, 없으면 과시가 된다”고 했다.
D 부사장 조언은 “형용사⋅부사를 최대한 걷어내라”는 것. “알맹이가 없으면 조미료 치듯 수식을 많이 쓰게 된다. 자신이 한 일을 팩트 중심으로 간결하게 쓰라”고 했다. 최철규 대표는 “‘며칠 밤새워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열심히 했다’ 등 자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하는 건 의미 없다. 객관적 근거가 핵심”이라고 했다. 김현정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 겸임교수도 “광고가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정작 제품 정보는 기억 안 날 때가 많다. 평가자에게 당신의 인상은 존재하지만 업적은 기억이 안 난다. 구체적 정보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어필하라”고 말했다.
단점을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하다. 김현정 교수는 “내 실수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자기를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100% 해야 하는 것을 80% 달성했지만 이번 경험으로 무엇을 배웠으며,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 프로젝트에 반영하겠다는 식으로 영리하게 쓰라”고 했다. ‘저자세를 피하라’는 얘기다.
다면 평가가 중요해지며 ‘고과 담합’도 생겨났다. 국내 IT 회사 직원 H(31)씨는 “동료 평가에서 상대 단점을 써넣어야 하는데 계속 얼굴 볼 사이라 신랄하게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 야근을 많이 하면 건강 해칠 수 있으니 앞으로 몸 좀 챙겨가면서 했으면 좋겠다’는 등 ‘단점 아닌 단점’을 적는다”고 했다. ‘고과 상부상조’인 셈이다.
◇상사의 기억을 믿지 말라
간혹 성과 보고서를 안 쓰고 평가자에게 ‘백지위임’하는 사람이 있다. 회계 법인 I(48) 임원은 “연차가 낮을 땐 자기 자랑하는 것 같아 안 쓰는 게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평가자가 돼 보니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지 알게 됐다. 최대한 자세히 쓰는 게 상사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열심히 했으니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상사는 당신의 성과를 기억할 만큼 한가롭지 않고, 기억력도 그리 좋지 않은 데다 관리할 사람도 많다.
김현정 교수는 세대별 차이에 주목했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수행평가로 어렸을 때부터 정성적, 정량적 평가를 받아온 세대라 평가에 익숙하다. 반면 X세대는 평가받기도, 평가하기도 낯설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직원 J(39)씨는 “일부 임원은 본인 평가서를 작성할 때 팀원이 초안을 잡아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20~30대 신세대 직장인은 적극적으로 자기 성과를 알린다. 정보 통신 회사 신입 사원 K(26)씨는 “연초 연간 계획을 세워 핵심 과제 3~4개를 정해놓고 과제별 평가 지표, 실행 방안을 입력한다. 이후 과제별 실행 결과와 자기 평가 점수를 수시로 써넣는다. 내가 한 일을 안 쓰기 억울해서 생각나는 건 모두 다 쓴다. 1년간 한 일 모두 빽빽하게 써냈다”고 했다. 외국계 물류 회사 직원 L(30)씨는 “인사 고과가 연봉과 직결되기 때문에 성과 관리에 매우 신경 쓴다. 1년 내내 성과 업데이트를 한다. 상향 평가도 있어 상사와 팀원 모두 서로에 대한 평가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다”며 웃었다.
성과 과포장을 막는 장치도 생겼다. 최철규 대표는 “인사 평가 시즌 전, 팀원이 모여 5분간 돌아가면서 자기 업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게 요즘 등장한 트렌드다. 특히 MZ 세대가 자기중심적으로 스스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공개적으로 말하면 동료와 함께 한 성과를 자기 혼자 한 것처럼 포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평가자에겐 ‘고차 방정식’
“부장 승진 대상자인 과장 5명이 있는데 이 중 한 명만 최고 등급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 사람에게 고과를 높게 주는 대신 보너스를 적게 주고, 나머지 과장 넷에겐 미안해서 보너스를 더 줬다.” D 부사장은 “인사 평가는 고차 방정식 심화 문제를 푸는 느낌”이라고 했다. 상대평가를 하는 모 대기업 M(47) 부장은 “1등하고 꼴찌 그룹 평가는 쉬운데 중간 평가가 어렵다. 수능 등급처럼 우열이 거의 안 가려지는데 순서를 세워야 한다. 평가 때가 되면 잠이 안 온다는 임원이 많다”고 토로했다.
평가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은 뭘까. 최철규 대표는 ‘최신 효과(recency effect·가장 최근에 제시된 정보를 더 잘 기억하는 현상)’를 경계 대상으로 꼽았다. “연초에 잘한 직원보다 근래 성과 있는 직원을 후하게 평가해선 안 된다. 3월에 시청률 40%인 드라마보다 10월에 20% 나온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가 연말 연기 대상을 받는 격”이라고 설명했다. 또 “평가자는 주관⋅기호⋅선호 등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피평가자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사 평가의 마지막은 결정된 고과를 바탕으로 직원에게 ‘피드백’을 하는 것. 기업들이 점차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정동일 교수는 “많은 관리자가 ‘팀원들에게 인생 교훈을 알려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피드백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어, 지켜보겠어, 당신은 잠재력이 뛰어나니까 해낼 거라고 믿어’라고 훈시한다. 자기만 기분 좋아지지 피평가자는 전혀 감흥을 못 느끼는 영양가 없는 얘기”라고 했다. 대신 “개선이 필요하다고 한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건지 피평가자 스스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시간을 주는 게 효과적”이라고 했다. 김현정 교수는 “최고 등급 빼고는 다 기분 나빠하는 게 현실”이라며 “피드백할 때 ‘우리는 한우 등급 나누듯 평가하는 게 아니다. 연초 목표가 높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고과를 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게 좋다”고 했다.
낮은 고과로 상심했다면 최철규 대표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고과 C를 받았다고 ‘나는 C급 인생’이라며 자학할 필요는 없다. 인사 평가는 인격 평가가 아니다. 5만원을 구긴다고 해도 5만원이다.” 꼬깃꼬깃해진 마음을 펴 내년을 맞는 게 현명하다.
◇요즘 트렌드는 신속한 ‘상시 평가’다
국내 기업에 인사 평가제도가 들어온 건 언제쯤일까. 성과 관리 전문가인 이찬(서울대 경력개발센터장) 서울대 교수는 “국내에서 성과 중심 인사 평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이후부터”라고 했다. 이 교수는 “호봉제였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라는 대로)’ 문화가 강했지만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IMF가 호봉제를 ‘기업 경영에 부담을 주는 제도’라 지적하면서 삼성 등 대기업이 연봉제를 도입했다. 이때 상대평가를 기반으로 한 미국식 성과주의 평가가 들어왔다”고 했다.
당시 대다수 국내 기업은 GE의 전설적 경영자 잭 웰치가 1981년 고안한 상대평가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 1년에 한 번 실시하는 인사 평가로 직원을 점수대로 줄 세워 상위 20%에는 승진 기회와 성과급을, 하위 10%에는 퇴출을 권하는 시스템으로, 철저한 성과 중심 제도였다. 목적은 내부 경쟁을 강화해 회사 매출을 극대화하는 것. 국내 대기업도 이런 문화를 들여와 상대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은 직원에게는 인사상 불이익을, 높은 등급을 받은 직원에게는 이익을 줬다.
최근 들어 인사평가는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뀌는 추세. 10여 년 전부터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고 부서 간 협업이 늘어나면서, 피 말리는 점수 경쟁이 오히려 기업 성장에 독이 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정동일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창의적 혁신'을 위해서는 부서를 넘나드는 협력 체계가 중요한데, 상대 평가는 옆 팀원을 협업 대상이 아닌 경쟁 상대로 바라보게 했다”고 설명했다.
대안으로 등장한 게 절대평가다. 내부 직원 간 과도한 실적 경쟁을 막고, 협업을 독려하기 위해 ‘줄 세우기 방식’을 없애는 것이다. 핵심은 ‘개인 성과만 보지 않는 것’이다. 직원 개인이 얼마의 매출을 올렸는지 보다 동료와의 협업으로 회사 전체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해외에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이 일찌감치 절대평가를 도입했다. ‘상대평가의 원조’ GE도 2015년 개인별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 국내에선 최근 SK텔레콤, 현대자동차 등이 절대평가로 전환했다.
최근엔 이마저도 없애는 기업도 나왔다. 최철규 HSG 대표는 “리더가 단순 평가자를 넘어 하급자가 발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언하는 ‘코치’로 보는 기업이 늘고 있다”며 “수시로 팀원에게 과제를 내주고, 피드백을 통해 팀원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무등급 상시 리뷰제’를 추진하는 회사도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정동일 교수도 “최근 혁신 기업들의 최대 화두는 ‘애자일(agile·민첩한)’ 평가 시스템이다. 인사평가 시즌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신속하게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유연한 기업 문화가 중요해졌다”고 했다. 넷플릭스·어도비 등 상당수 실리콘밸리 IT 기업이 별도의 평가 시즌을 두지 않고 상사가 수시로 직원들을 만나 업무 성과에 대해 피드백하는 ‘상시 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SK, 네이버 등 일부 기업에선 같은 회사라도 업무별로 인사 평가 시스템을 달리하기도 한다. SK 관계자는 “전체 회사가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맡은 업무 특성에 따라 조직별로 인사 평가 방식을 ‘셀프 디자인’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