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가 있기 전, 태초에 ‘빠’가 있었다.

인플루언서이자 쇼핑몰을 운영한 임블리(본명 임지현)의 안티 계정을 만든 이는 임블리의 VVIP 고객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인플루언서의 까판을 만든 운영자나 제보자들도 해당 인플루언서 팬이었고, 물건을 여러 차례 구매한 적이 있다고 했다. 팬이 한순간에 안티로 돌아선 셈이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밤을 새워 인플루언서의 까판에 빠진 장모(33·주부)씨는 “내가 즐겨 보고 동경하던 인플루언서의 이면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평소 이 인플루언서를 지켜보지 않고 물건도 사지 않은 사람에게 까판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인플루언서 ‘임블리’가 운영한 쇼핑몰 충성 고객이 만든 인스타그램의 임블리 안티 계정. /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형 SNS ‘싸이월드’와 함께 시작됐다. 당시 싸이월드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강희재, 김예진, 전경진씨 등은 팬덤을 바탕으로 쇼핑몰을 성공시켰다. 이들은 일상 모습을 싸이월드에서 보여주고 그 이미지를 판매까지 연결한 1세대 인플루언서였다. 이후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거쳐 현재 인플루언서들이 상업적으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플랫폼은 인스타그램이다. 물건을 파는 인플루언서들의 공식 명칭은 ‘SNS셀러’ ‘인스타그램 셀러’지만, 팔로어만 늘면 뭐든지 갖다 판다는 의미로 ‘팔이’ ’82피플'이라고도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공구 형식으로만 육아 용품을 파는 박모(41)씨는 “날씬한 여자가 인플루언서 되면 다이어트 보조제 파는 것이고, 피부 좋은 여자가 팔로어 늘리면 화장품 파는 것”이라고 했다. 박씨도 상품을 팔 때 아들 사진을 올린다.

인플루언서와 SNS셀러가 되려면 일명 ‘시녀’라고 하는 충성 고객이나 추종자가 있어야 한다. 이들은 가격이나 품질을 따지는 게 아니라 판매자에 대한 믿음이나 애정으로 제품을 구매한다. 인플루언서의 게시물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까판 운영자들이 인플루언서가 파는 옷을 입은 일반인 사진을 ‘시녀’라고 올리는 시녀 저격 계정도 따로 만들었을 정도로 이들은 인플루언서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시녀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은 웬만한 대기업 쇼핑몰이나 백화점을 능가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 쇼핑몰처럼 인스타그램에서 라이브 방송(이하 라방)을 하거나 ‘판매 마감 시간’을 정해놓은 공동 구매(공구) 형식으로 물건을 판매한다. 까판 때문에 사업을 접은 한 인플루언서는 라방 한 번에 수천 시청자가 몰려 4억, 5억원치를 팔았고, 단가가 낮은 물건도 한 번에 2억씩 팔았다. 인플루언서에게 제품 판매 의뢰를 한 적이 있는 한 식품 수입사 임원은 “강남 백화점에서도 도무지 팔 수 없는 수량을 주문해서 처음에는 거절했다. 첫 라방에서 완판을 하고, 이걸 네댓 번이나 더 품절시켰더라”고 놀라워했다.

SNS 셀러에게 물건을 구매할 경우 환불이나 교환, AS 등을 보장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돈을 지출하는 이유가 뭘까. 한 인플루언서는 “인스타그램에선 인플루언서가 다이아몬드나 모피 같은 고가품을 잘 판다. 인플루언서의 팬 입장에서 보자면 백화점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사는 것보다 평소에 지켜보고 친구처럼 느껴지는 사람한테 사는 게 더 마음이 편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