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덕동 '영앤도터스'의 딥캐러멜라테(앞)와 싱글브루잉 커피./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교복 안주머니에서 밀크 캐러멜을 꺼냈다. 한국에서 고3을 보낸 이라면 으레 그렇듯 가까스로 매일을 견뎠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매점에 가서 캐러멜 한 통을 샀다. 은밀히 감추고 교실에 돌아와 책상에 엎드렸다. 몰래 입에 캐러멜을 넣었다. 그때쯤 들리는 소리. “나도 하나 도(줘).” 옆에 엎드려 있던 짝이 귀엣말을 했고 나는 암거래하듯 작은 정육면체를 책상 밑으로 넘겼다.

그때는 캐러멜을 직접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설탕을 물과 섞은 뒤 서서히 가열하면 물이 증발하면서 캐러멜이 만들어지는 것을 서른 넘어 요리를 시작하며 알았다.

서구에서 캐러멜은 조리 기법을 넘어 한 장르다. 한국에서는 초콜릿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디저트를 즐기면 즐길수록, 한국에도 부드럽고 차분한 캐러멜을 전면에 내세운 곳이 늘어가고 있다.

서울 삼성동 삼성중앙역에서 선정릉 쪽으로 길을 걷다 보면 시원한 통창을 단 ‘브레드 바이’가 있다. 오픈 진열대에는 식빵을 비롯한 식사 빵이, 안쪽 카운터로 들어서면 유리 쇼케이스 안에 작은 케이크들이 놓였다. 보통 식사 빵이 주력이면 케이크 디테일이 떨어진다. 케이크만 팔면서 식사 빵은 아예 안 다루는 곳도 많다.

이곳은 욕심스럽게 두 가지를 모두 갖췄다. 국영수뿐만 아니라 예체능까지 잘하는 엄친아처럼 둘 모두 수준 이상이다. 차진 식감과 부드러운 감촉을 모두 지닌 식빵, 결결이 찢어지는 크루아상, 둥글고 크게 구운 호밀빵 모두 모양새부터 알차고 단단했다. 디저트로 눈을 옮기면 국가 대표팀같이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케이크가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차를 곁들이기 좋은 제주당근케이크, 크림치즈와 커피젤리로 재해석한 티라미수는 틀릴 수 없는 메뉴였다.

그러나 캐러멜을 전면에 내세운 ’100% 캐러멜'과 ‘솔티 캐러멜 밀푀유’는 귀여운 악동처럼 잊히지 않는 맛을 지녔다. 100% 캐러멜은 그 이름처럼 속에는 캐러멜 무스가 담겼고 바깥은 견과와 초콜릿으로 껍질을 만들었다. 맨 안쪽에는 캐러멜 크림이 있었다. 건축물 같은 구조로 이뤄진 이 케이크는 외관이 먹기 아까울 정도지만 입에 넣기 시작하면 1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거품처럼 사그라지는 무스의 물성, 단단하지만 찬란히 부서지고 마는 얇은 초콜릿, 그리고 부드럽게 혀를 감싸며 달고 고소한 여운을 남기는 캐러멜 크림이 하나가 되어 발끝까지 찌릿한 맛을 전했다.

옛날에 먹던 캔디와 같은 캐러멜을 찾는다면 가로수길에 자리한 ‘마망갸또’로 가야 한다. 단정한 2층 건물에 자리한 마망갸또의 캐러멜은 핑크솔트, 밀크, 라즈베리 등 10여 가지 맛이 있다. 우유 맛이 진하게 남는 예전 맛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캐러멜 특유의 맛 때문에 보통 견과류를 이용해 맛을 내지만 이곳은 무화과, 패션푸르트 같은 다양한 과일을 적극적으로 쓴다. 이에 달라붙는 불쾌함 없이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듯 저항감 없이 녹아나는 캐러멜의 식감에 하나가 둘이 되고 또 셋이 되었다.

캐러멜을 꼭 씹어 먹을 필요는 없다. 당 충전이 필요할 때 마시는 캐러멜 마키아토처럼, 음료로 즐기는 것도 방법이다. 공덕 로터리를 지나 서울서부지방법원까지 올라가면 ‘영앤도터스’라는 카페가 있다. 간판도 없는 이곳에 가면 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들 손에는 ‘딥캐러멜라테’가 들려 있다.

펄펄 끓는 탕국 같은 커피가 아닌, 섭씨 70~80도 언저리로 온도를 낮추어 우유의 단맛을 극대화 한 카페라테와 그때그때 내린 ‘싱글브루잉’ 커피에는 단지 커피 내리는 기술뿐만 아니라 어떻게 음료를 내겠다는 ‘생각’도 담겼다. 종이컵에 커피를 담을 때도 미리 컵을 뜨거운 물로 헹궈 미묘한 온도감과 깨끗한 맛을 지켰다.

소금으로 유리잔 가장자리를 두른 칵테일 마르가리타처럼, 종이컵 둘레에 캐러멜과 견과류를 골고루 입혀서 내는 딥캐러멜라테는 단 한 모금에 승부가 갈렸다. 절정에 가깝게 치솟는 단맛에 눈이 뜨였다. 그 끝을 장식하는 감미로운 캐러멜의 여운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한 모금 한 모금, 조금씩 나눠 마셔도 그 한 잔은 이내 바닥을 보였다.

가게를 나와 몸속에 남은 캐러멜 향기를 맡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 차가워지는 대지, 그 사이를 메우는 서늘하지만 고소한 냄새. 가을이었다. 빈 종이컵을 들고 길을 걸었다. 모든 것이 익어가는 이 계절의 향기가 몸을 감쌌다.

#영앤도터스: 싱글브루잉 3500원, 카페라테 4500원, 딥캐러멜라테 5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