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전 9시. 20~30대 청년 9명이 등산복 차림으로 서울 독립문 앞에 나타났다. 부산하게 인원 점검을 마친 이들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쓰레기봉투와 면장갑, 집게였다. 등산 가방에서 청소 용품이?

이들의 정체는 무악산(안산) 클린 하이킹을 위해 모인 ‘클린 하이커스’. 등산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클린 하이킹은 플로깅(plogging)의 산악 버전이다. 플로깅은 이삭을 줍는다는 뜻의 스웨덴어 ‘plocka upp’과 조깅(jogging)을 줄인 말로, 길가의 쓰레기를 주우며 달리는 일종의 환경 캠페인이다. 한국에선 입에 착 달라붙게 ‘줍깅’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주말’은 지난 13일 클린 하이커스와 함께 무악산을 탔다. 높이 296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에서 쓰레기가 얼마나 나올까.

기자는 지난 13일 하이커들과 무악산 '클린 하이킹'에 나섰다. 벽화가 김강은씨와 등산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모습.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카톡으로 ‘헤쳐 모여’

이날 모임은 며칠 전 벽화가 김강은(30)씨가 제안해 급조된 ‘번개’였다. 클린 하이킹 운동 최초 제안자기도 한 김씨는 “하이커 70여 명이 모인 단톡방에 누군가 산행 일정을 올리면 시간이 되는 하이커들이 자유롭게 참여한다. 소셜미디어(SNS)로 신청한 새로운 하이커들과도 정기적으로 산행에 나선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참가자 중 5명은 클린 하이킹을 처음 경험하는 신입 회원이었다.

포장 산책로가 이어지는 첫 500m 동안은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기자가 가져간 20L 종량제 봉투는 텅 비어 있었다. ‘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이라 관리가 잘됐구나’ 생각했다. 2년 차 클린 하이커 이은민(36)씨가 말을 걸었다. “100% 깨끗한 산은 없어요. 조금만 올라가도 쓰레기가 무더기로 나올 거예요.”

그 말이 맞았다. 시선을 땅에 박고 걷자 곳곳에서 쓰레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등산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 천지였다. 참치 통조림 캔, 귤 껍질, 폐우산, 담배꽁초···. 종류도 다양했다. 하이커들은 심마니처럼 자연스럽게 흩어져 곳곳에서 쓰레기를 집어 올렸다.

'클린 하이커스' 멤버들이 등산로 주변에 쌓인 쓰레기를 줍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여기, 대박!”

쉼터 근처를 뒤지던 고원상(34)씨가 다른 하이커들에게 소리쳤다. 급히 달려가 보니 페트병과 맥주 캔, 음식 쓰레기가 한곳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쏟아버린 모양이었다.

고씨가 쓰레기를 담는 동안, 김강은씨는 산책로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비닐봉지 끄트머리가 살짝 보여서요.” 한참을 파 내려가 건진 건 70년대 라면 포장지. 흙 속에 오래 묻혀 있던 탓인지 글자색이 조금 바랬지만, 비닐 포장지는 아직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옆에서 ‘쓰레기 발굴’ 과정을 지켜보던 최연소 하이커 박지연(22)씨가 “진짜 유물을 봤다”며 까르르 웃었다. 김씨는 “깊이 파묻혀 있는 쓰레기가 많아 집게만으로는 쉽지 않다. 손 쓸 일이 많다”고 했다.


◇“주운 쓰레기로 예술품 만들죠”

쓰레기를 주우며 산을 오르니 평소 같으면 30분 안에 주파할 무악산 정상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땅에 묻혀 있던 쓰레기가 곳곳에서 나온 탓이다. 각자 주워 온 쓰레기를 한데 모아놓으니 20L 종량제 봉투 세 개를 채울 분량이었다. 기자가 가져간 봉투는 어느새 쓰레기로 꽉 차 한 쪽이 찢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정상에 모여 쉬던 하이커들이 갑자기 색깔 있는 쓰레기만 골라내기 시작했다. 모아 온 쓰레기로 즉석에서 간단한 작품을 만드는 ‘정크 아트(junk art)’를 한다고 했다. ‘클린 하이커’를 형상화한 모형이 10분 만에 뚝딱 만들어졌다. 쓰레기 예술 창작자들은 작품 앞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인증 샷을 찍었다. 김강은씨는 “단순히 쓰레기를 줍기만 하면 등산이 일처럼 느껴진다. 정크 아트 작업을 SNS에 공유하면 참가자들도 보람을 느끼고, ‘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메시지도 전할 수 있다”고 했다.

산에 오르며 주운 쓰레기로 만든 정크 아트. 클린 하이커를 형상화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촬영을 마친 이들은 다시 쓰레기를 분리 수거해 각자 봉투에 담았다. 이렇게 모인 쓰레기는 하산 후 분리 수거함에 넣는다고 했다.

하이커들은 “클린 하이킹은 재미와 보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취미”라고 입을 모았다. 정신 병원에서 근무하는 10년 차 사회복지사 김정연(34)씨는 이날 연가를 내고 참여했다. 김씨는 “평소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산에서 푼다. 맘 맞는 사람들과 산을 타면서 의미 있는 일도 하니 일석이조”라고 했다.

2016년 스웨덴에서 시작된 플로깅은 이미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Plogging’ 등 해시태그를 단 플로깅 인증 샷 문화가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하며 자리 잡았다. 프랑스에서는 정기적으로 플로깅 마라톤이 열리고, 귀드니 요하네손 아이슬란드 대통령이 집 주변에서 플로깅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