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줄 게 어딨어요. 나도 구경 못 했는데.” 지난 6일 용산 선인상가에서 엔비디아(NVIDIA)의 신형 그래픽카드 ‘RTX 3080’을 사고 싶다고 하자 돌아온 답변이다. 지난 9월 발매된 RTX 3080은 전작과 같은 가격에 게임 성능이 최고 2배에 달해 게이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정작 ‘컴퓨터 메카’인 용산 전자상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선인상가 매장 10여 곳 중 재고가 있는 곳은 두 곳. 그나마도 이미 예약된 제품이었다. 용산에서 17년간 도매업을 했다는 김웅규(50)씨는 “신제품을 단 한 장도 구하지 못한 적은 처음 같다”며 “옆 매장에 입고된 제품을 구경 갔다 왔을 정도로 찾기 어렵다”고 했다.

20여 년간 국내 컴퓨터 부품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던 ‘용산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전과 달리 수입사들이 용산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제품을 쿠팡, 위메프 등 오픈 마켓에 직접 내놓으면서 생긴 일이다. 용산 상인들 사이에선 “이제 우리는 완전히 도태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 용산 안 거치고 직판 나선 수입사

그간 컴퓨터 부품은 최소 3~4단계를 거쳐 소비자 손에 들어왔다. 먼저 제품 수입을 담당하는 수입사가 해외 제조사와 계약하고 일정 물량을 한국에 들여온다. 수입사는 각 총판에 물건을 전달하고, 총판은 이를 다시 도매상에 납품한다. 도매상이 소매상에게 물건을 넘기면 소매상이 온·오프라인 채널로 제품을 판다. 이 과정에서 각 중간상이 1.5~3%의 마진을 남긴다.

지금까지는 주요 총판과 도매상, 소매상이 모여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용산 전자상가가 국내 물량 대부분을 유통했다. 유통 권한이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일부 인기 제품은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엔비디아가 2년 전 출시한 그래픽카드 RTX 2080은 부가세를 뺀 권장 소비자 가격이 699달러(약 81만원) 수준이었지만, 한국에선 100~120만원대에 팔렸다. 소비자들은 용산만 거치면 부품 값이 뛴다며 ‘용리미엄(용산+프리미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AS를 포기하고 해외에서 부품을 직구하는 이도 많았다.

그런데 수십 년간 유지되던 용산의 공급 구조가 지난달부터 급격히 변하고 있다. 수입사가 총판, 도매상, 소매상을 모두 건너뛰고 직접 오픈 마켓을 통해 물품을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수스(ASUS)의 한국 수입사 인텍앤컴퍼니는 신형 RTX 3080의 초도 물량 150개를 전량 쿠팡, 11번가 등을 통해 판매했다. 기가바이트, 이엠텍 등 국내외 제조사들도 자사 몰과 하이마트 등에만 물건을 공급했다. 가격도 시장에서 예상하던 100만~120만원 선보다 훨씬 낮은 90만원대였다. 이들이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풀면서 이들보다 비싼 가격에 제품을 올린 일부 소매업자가 가격을 급히 내리기도 했다.

지난 6일 오후 한산한 용산 선인상가 모습. 최근 일부 컴퓨터 부품 수입사가 신형 그래픽카드를 용산 도매상에 공급하는 대신 쿠팡 등에서 직판에 나서면서, 이곳에선 해당 그래픽카드를 찾기 어려워졌다. /유종헌 기자


◇"재고 위험 사라지고, 소비자 똑똑해져"

수입사가 직접 물건을 판매하려 나선 이유는 다양하다. 먼저 유통 업계가 대형 소셜커머스 업체 위주로 재편되면서 총판­→도매상→소매상으로 이어지는 기존 유통 구조가 설 자리를 잃었다. 그간 수입사들이 높은 수수료를 감내하면서 총판에 물건을 납품했던 것은 한국의 컴퓨터 시장 규모가 작아 재고 처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쿠팡, 위메프 등 소셜커머스 업체는 자체 물류 창고를 갖추고 제품을 직매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하기 때문에 수입사도 재고 부담이 없다. 선인상가 소매업자 이모(53)씨는 “수입사로선 우리에게 납품하나, 쇼핑몰에서 직접 파나 마진은 비슷할 테니 기왕이면 회전이 빠른 대형 유통 채널에 넘기는 것 같다”며 “이해는 가지만 씁쓸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엔비디아가 지난 9월 출시한 최신 그래픽카드 'RTX 3080'. /엔비디아


좀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컴퓨터 기술자들의 결집소’라는 용산의 장점이 사라지면서, 유통 구조가 중개자 중심에서 생산자 직접 판매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유통학회장을 지낸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엔 컴퓨터 부품을 고를 때 용산 전문가의 설명이 필수였지만, 요즘은 ‘유튜브 선생님’을 통해 누구나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서 “가격 경쟁이 중요해지면서 중간상의 존립 근거가 희미해지고 있다”고 했다. 용산 전자상가는 2000년대 초반까지 연매출 10조원을 웃돌았지만, 이후 몰락을 거듭해 2018년에는 평균 공실률 22.7%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