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7시, AI 스피커에서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 아이린의 경쾌한 목소리가 알람 소리를 대신한다. 눈을 겨우 뜨고 “빅스비” 하고 외치자 스마트폰에서 배우 강소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나지막하게 울리는 이 한마디에 빅스비가 뭐든 도와줄 것처럼 믿음이 간다. 유튜브를 열어 ‘요가 소년’의 담백한 목소리에 따라 15분 동안 아침 요가를 한다. 아침 식사를 준비할 땐 오디오북 앱에서 내려받은 ‘날개(이상)’를 틀어놓는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배우 김태리가 연기하듯 낭독해주는 걸 들으면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TV와 라디오를 틀지 않고도 기상 후 한 시간 만에 아이린, 강소라, 요가 소년, 김태리 등 네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1981년 MTV 개국 당시 맨 처음 전파를 탄 뮤직비디오가 영국 밴드 더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1979)였다. 영상 때문에 오디오 스타들이 사장(死藏)될 것이라고 예언한 셈이다. 40년이 지난 현재, 오디오 스타들은 죽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음성 인식 기술이 발전한 데다 멀티태스킹(두 가지 이상 작업을 동시에 하는 것)을 하려면 오디오가 필수불가결해졌다. 목소리가 팔리기 시작했다.

공유가 속삭여주는 이야기 들으며 잠든다

직장인 유보라(26)씨는 통근 버스에서 책을 듣는다. 지난해 좋아하는 배우 정해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오디오북을 재생했다가 요즘엔 배우나 가수 등 유명인이 읽어주는 책을 찾아가며 듣고 있다. 유씨는 “한 달에 책을 한 권 읽을까 말까 했는데,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한 이후로 한 달에 세 권 이상의 책을 들었다. 책을 읽는 것만큼 집중해야 할 필요가 없고, 발성과 울림이 좋은 배우의 목소리를 들으면 출퇴근할 때 차분해진다”고 했다.

출판 시장이 침체한 지는 오래지만, 오디오북 시장은 이제 경쟁에 불이 붙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선 월 2만3000명이 오디오북을 듣고 있으며, 누적 사용자 수도 21만명에 달한다. 오디오클립의 ‘셀럽 오디오북’, 전자책 구독 서비스 업체인 밀리의 서재 ‘리딩북 서비스’ 등은 연예인을 동원해서 오디오북을 만들었다. MBC ‘책을 듣다’와 아이돌이 문학책을 읽어 내려가는 EBS 라디오 ‘아이돌이 만난 문학’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연예인들이 책을 읽었다. 배우 최민식, 이병헌, 정해인, 강하늘, 변요한, 이제훈, 정상훈, 한지민, 유인나, 이연희, 이엘, 박은혜, 이상윤, 백진희를 비롯해 가수 배철수, AOA 설현, 장기하, 장재인, 워너원 하성운 등이 참여했다. 한지민이 읽은 ‘법륜 스님의 행복’은 총 2만권 이상이 팔렸고, 정해인이 읽은 ‘오 헨리 단편선’은 유료와 무료(미리 듣기) 재생 수가 20만회를 넘는다.

라디오처럼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전용 콘텐츠도 늘어났다. 국내 대표적인 팟캐스트인 팟빵은 지난해 총 청취 시간이 약 1억7400만 시간으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207% 증가했다. 2018년 7500개였던 유료 콘텐츠도 지난해 1만2700개로 늘어났다. 오디오 방송 플랫폼 ‘스푼 라디오’의 아이템 판매액은 2016년 7000만원에서 지난해 486억원으로 늘었다. 올해는 코로나19 이후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디오 콘텐츠의 이용 시간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집안일을 하며 들을 수 있는 데다가 수면이나 명상에는 목소리를 활용한 오디오 콘텐츠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팟빵의 1월 3주차 누적 청취시간은 335만4447시간이었다가 3월 2주차에 483만2645시간으로 늘어났다.

정신 건강을 위한 수면, 명상에도 목소리가 활용되면서 더 인기다. 명상·수면 앱 '캄' 한국어 내레이션엔 배우 이상윤이 참여했다. 영어 버전에선 미국 배우 매슈 매커너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디오클립에서 수면용으로 내놓은 ‘베드타임스토리’의 목소리 주인공은 배우 공유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의 ‘베드타임 스토리’를 녹음하는 배우 공유.

동영상은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집중해야 하는 데 반해 오디오는 청각만 이용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네이버의 양하나 과장은 “요즘 일상에서 멀티태스킹(두 가지 이상 작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 늘어나면서 오디오 콘텐츠가 각광받고 있다. 예를 들어 Z세대는 게임을 하면서 유튜브도 틀어놓고 인스타그램도 본다”고 했다. 종이책에 익숙지 않거나 책을 읽을 만한 집중력이나 시간이 없는 경우에도 오디오북을 선호한다. 중학교 교사인 이수정(38)씨는 “반에서 3분의 1에서 절반에 가까운 학생이 종이책이나 활자로 정보를 얻는 것을 어려워한다. 독후감 숙제를 내주면 오디오북을 찾아 듣는 경우가 해마다 늘고 있다”고 했다.

AI 스피커가 보급되고, 음성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목소리는 더 많이 팔릴 전망이다. 음성 AI는 스마트 단말기(스마트폰, AI 스피커 등) 음성 명령을 인식해 각종 음성 기반 서비스를 활용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지난 18일 삼정KPMG에서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딥러닝 기술 발달과 음성 인식 기술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변하면서 음성 AI가 급성장하는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AI 스피커 누적 판매량이 2019년 3월 기준 412만대로 전년 대비 2배가량 증가했다. 지난해 말까지는 800만대가 팔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음성 AI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얼마나 사람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들릴 수 있느냐는 것. 귀에 익은 연예인의 목소리를 활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SKT의 AI 스피커 ‘누구’는 지난해 11월 아이린의 목소리로 알람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내놨다.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의 AI 비서 서비스인 ‘빅스비’는 지난 2일부터 배우 강소라, 김소현, 김예원의 목소리를 추가했다.

온라인 강의, 유튜브 하려고 ‘목소리 성형’도

연예인의 목소리만 상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와 팟캐스트 등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하는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일반인도 목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유튜브는 동영상 플랫폼이지만, 청각 요소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프로 유튜버에 딱 맞는 목소리 만들기’의 공저자 선호제 성우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사이렌 소리와 깃발로 위급 상황을 알렸을 때 사람들이 여기에 반응하는 행동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이렌 소리를 들었을 때 더 빨리 움직였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유튜브 동영상을 볼 때 사람들은 화면보다 소리를 먼저 인지한다”고 했다.

선씨에 따르면 예전에는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말을 많이 하는 전문직이 보이스 스타일링 센터를 찾아왔다면, 최근 유튜버를 하려는 일반인이나 회사원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해 목소리 교정을 위해 스피치 학원에 다닌 회사원 김혜진(42)씨는 “목소리가 가늘고 떨려서 프레젠테이션이나 보고 때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머리 모양을 바꾸고 성형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도 필요하다면 바꿔야 한다”고 했다.

대기업 TV 광고 등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는 성우 정유안씨도 최근 목소리를 교정해 달라는 사람들의 의뢰를 부쩍 많이 받았다. 그중에는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동영상 강의가 늘어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한 학교 교사나 학원 강사도 있다. 정씨는 “동영상에서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없거나 웅얼웅얼거리는 것 같다며 찾아온다. 온라인 비대면 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목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