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수산시장 주차장 3층 A19번 기둥 앞으로 오세요.” 대장간이 과연 있을까 싶은 어둡고 외진 주차장 한쪽. 칼을 서너 자루씩 손에 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사람들 뒤로 5평 남짓 돼 보이는 작고 좁은 가게가 있다. “윙~” 날카로운 금속 갈리는 소리가 가게 밖으로 새어 나왔다. 불꽃이 번쩍 튀었다.

이곳은 대장장이 부자(父子) 전만배(63)·전종렬(31)씨가 운영하는 ‘한밭대장간’이다. 칼갈이로 국내 최고를 다툰다는 곳이다. 보통 칼갈이 전문점에서 주방 칼 한 자루당 3000원을 받는다. 한밭대장간에서는 처음 칼 갈러 온 손님에게는 한 자루당 1만1000원을 받는다(두 번째 방문부터는 3300원). 3배가 넘는 가격인데도 칼을 생명처럼 여기는 요리사와 수산시장 상인, 정육점 주인, 조리학과 학생들이 전씨 부자를 찾는 이유가 있다.

‘참치왕’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참치 조리 명인 1호 양승호 요리사는 “매장 3곳에서 쓰는 칼을 모두 한밭대장간에 맡긴다”고 했다. “내가 쓰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칼을 맞춤 연마해주는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대장장이 4대째인 곳이다 보니 칼에 대한 이해도가 그 어디보다 높고요.”

대전 한밭대장간에서 아버지 전만배가 아들 전종렬씨의 칼 연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전만배씨는 “스타일이 다르다 뿐이지 아들의 칼 가는 솜씨는 나와 대등한 수준"이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전씨 집안은 대대로 쇠를 달궈 연장을 만들었다. 아버지 전만배씨가 대장장이 3대, 아들 전종렬씨가 4대다. 전만배씨는 “할아버지가 100여 년 전 충남 부여군 세도면 금박골에서 대장간을 시작했다”고 했다. 전씨 집안 기록은 지난 2015년 발간한 ‘세도면지(誌)’에도 나온다. ‘세도의 대장간은 두 곳이 있었으며, 1916년 전종식이 금박골에 대장간을 제일 먼저 세웠다. ··· 20여 년 세월을 장인으로 지낸 전종식이 사망하자 대를 이어 장자인 전하창이 10대 중반 어린 나이에 대장간을 물려받아 장인 정신을 이어갔다. 1946년 시작한 2대 장인 전하창은 27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세도에서 필요로 하는 농기구는 물론 소달구지용 바퀴 및 말굽용 편자까지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 및 소모품, 장식품을 제작·공급하였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가세가 기울자 27년간 운영해오던 대장간을 정국진에게 넘겨주고 세도를 떠났다.’

대전에서 칼 만드는 아버지

전만배씨를 만나러 대전으로 갔다. 대전 대장간은 아버지 전만배씨가, ‘한칼’로도 통하는 서울 노량진시장 지점은 아들 전종렬씨가 맡아 운영한다. 대전 대장간에서는 칼을 만들고, 서울 한칼은 칼 생산의 마지막 단계인 연마와 판매로 특화했다.

– 대장간을 넘겨주게 된 ‘뜻하지 않은 사정’은 뭐였나요.

“아버지가 친구들 꼬임에 빠져서 도박을 했어. 전답을 이틀 만에 다 날리고 야반도주했지. 그 후로 전국을 돌아다녔어. 아버지를 따라 시골 5일장 이곳저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어. 경기도 첩첩산중에서 잠깐 살 때였어. 하루는 어머니가 남의 집 대문간에 있는 밥을 가져와서 물에 씻어서 주더라고. 나는 쌀밥 주니까 좋았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대문간에서 훔쳐 온 게 개밥밖에 더 있겠어. 그렇게 고생을 겪다 보니 생활력이 높아졌지.”

–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일찍 대장장이 일을 시작한 건가요.

“아버지 일 도운 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야. 그때는 풀무(불 피울 때 바람을 불어넣는 도구)라고 있었어. 학교 끝나고 풀무 불어주면 풀빵도 얻어먹고 아이스케키도 얻어먹고 하니까 어려서부터 대장간 일은 봐왔지. 하지만 어려서 꿈이 군인이었어. 대장장이는 생각도 안 했지.”

– 그럼 어떻게 열네 살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하게 된 건가요.

“아버지가 서울 마장동에서 대장간을 할 때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아. 12월 24일이면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아침에 놀러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너 칼 좀 갈아 봐’ 해. 그런데 아버지가 기대한 차원을 뛰어넘은 거야. 칼을 너무 잘 가는 바람에 중학교도 안 가고 대장간에서 일했지. 그러곤 1년 만에 전 과정을 혼자 마스터했지. 우리 아버지도 쫓아내고 공장을 전부 운영했지.”

생존하기 위해 칼에 집중하다

대장간은 잘됐고, 돈벌이도 좋았다. 그러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하락길을 걷기 시작했다.

– 1980년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농사가 기계화되면서 농기구 수요가 확 줄어든 거야. 신도시 개발이다 해외 파견이다 해서 건설 붐이 일었지. 집 지으려면 철근을 자르고 묶고 해야 하잖아? 거기 나가면 벌이가 짱짱했거든. 대장간 하던 사람 중에서 젊고 인맥 있으면 전부 철근공으로 빠져나갔지. 게다가 1992년 중국하고 수교하면서 중국에서 농기구가 싸게 들어와. 국내에서 만든 게 2000원이면 중국에서 1000원, 500원짜리가 들어온 거야.”

– 그래도 대장간을 접지 않으셨네요.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할까 궁리해보니, 나 혼자서 하기 쉬운 게 칼이더라고. 사실 예전 대장장이들은 칼을 우습게 여겼어요. 낫 만들어 쓰다가 부러지면 그걸로 만드는 게 칼이었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아니야. 요리사들에게 칼은 자신의 분신과 같아. 칼이 조금만 다르면(우수하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더라고. 마지막 살아남을 게 칼밖에 없겠구나 싶었지.”

전만배씨가 한밭대장간에서 생산한 ‘한칼’ 브랜드 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칼 몸통에 '田'자와 방패 모양 한칼 로고가 새겨져 있다./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그렇게 전만배씨는 쇠로 만드는 여러 도구 중 칼에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1996년 대전에 한밭대장간을 차렸다. ‘한칼’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칼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한밭대장간의 칼’ ‘한국의 칼’ ‘하나밖에 없는 칼’이란 의미다. 칼 몸통에는 '田' 자와 방패 모양 안에 ‘HANKAL(한칼)’이라고 로고를 새겼다. 2006년에는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에 ‘지사’를 냈다.

– 서울에 지점을 낸 이유는 뭔가요.

“살아남으려면 칼을 직접 생산해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고 직접 서비스해야겠더라고. 그래서 노량진시장에 차렸지.”

– 칼 쓰는 사람들이 고분고분하던가요.

“갖은 무시를 당했지. 칼갈이에 대해 비싸다느니 숫돌에 손으로 갈아야 하는데 기계는 안 된다느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와서 따질 거면 오지 말라고 했지. 나도 존심(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야.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굽히지 않아. 하지만 칼을 기가 막히게 살려 놓고 각자 원하는 대로 맞춤 연마해주니까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오더라고.”

– 맞춤 연마라는 게 뭔가요.

“같은 칼이라도 사람마다 쓰는 방법이 달라요. 고기를 썰어야 하는데 칼이 힘들게 들어간다, 그러면 중부(칼등과 칼날 사이)를 얇게 까주면 돼. 고기 겉에 붙은 기름을 벗겨내야 한다거나 포를 떠야 한다고 하면 거기에 맞게 칼을 변형해 줘. 생선회를 뜨더라도 요리사에 따라서 칼 폭이 좁은 걸 선호하기도 하고 넓은 걸 선호하기도 하지. 칼날을 매부리코처럼 만들어 쓰는 요리사도 있어. 게다가 각각 성격과 체격, 손 크기도 모두 다르지. 이 모든 걸 고려해서 단 한 사람을 위한 칼을 만들어주는 거지. 이렇게 하려면 처음 왔을 때 상담을 오래 해야 해.”

– 직업병 같은 게 있나요.

“식당에 가면 칼과 가위부터 보여. 고깃집 가서 가위가 잘 들지 않으면 직원한테 ‘소주 얼른 가져 와’ 그래. 소주병 모가지를 가위로 자르듯 몇 번 문지르면 기가 막히게 잘리거든. 새 가위보다 더 잘 들게 만드는 응급처치법이야. 칼날 응급처치할 때 가장 좋은 건 뚝배기. 아니면 접시. 뚝배기나 접시 엎어놓고 굽에다가 몇 번 문지르면 아주 날카로워지지.”

– 칼을 보면 쓰는 사람 성격도 보이나요.

“급한 사람은 성질 부리다가 칼날 이빨이 나가버려. 온화한 사람은 여기저기 많이 맡겨. 그러다 보면 칼이 많이 망가져 있어. 섬세한 사람들은 칼을 가져와도 손댈 부분이 없어. 많이 쓴 부분이 닳았지만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진짜 성격 다 나온다니까.”

– 조폭도 칼 갈아달라고 오나요.

“드물게 가져오기도 하지만 절대 안 갈아주지. 칼 보면 대강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알 수 있어. 조폭 같으면 ‘도검류 소지 허가증 있으면 갈아주겠다’고 해. 그러면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가버리지.”

서울에서 칼 가는 아들

서울 노량진시장 매장에서 오후 5시 30분에 만난 전종렬씨는 시커먼 쇳가루와 땀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밭대장간 서울 지점은 오전 8시 문 열고 오후 4시쯤 마감해 5시 30분 문 닫는다. 전씨는 “온종일 화장실 한번 못 가고 300자루쯤 갈았다”며 기진맥진 의자에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 말 걸기가 죄송할 만큼 피곤해 보입니다.

“퇴근하면 밥 먹고 바로 누워서 자요.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해요. 지금 생각하면 옛날 아버지가 참 대단하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주말마다 가족 데리고 놀러 다니셨거든요. 차에 텐트 하나 싣고 강원도 국도 타고 가다가 괜찮은 계곡 있으면 텐트 세우고 1박 하고 다음 날 이동하고. 어렸을 때 그 기억밖에 없어요. 너무 재밌고 좋았거든요. 그 힘든 일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신기해요. 수퍼맨이죠, 수퍼맨. 저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저는 지금 강아지 키우기도 힘든데.”

– 원래 꿈은 반려동물 사육사였다면서요.

“대학에서 애완동물 관리를 공부했어요. 그런데 사육사로 뽑히려면 연줄이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깔끔하게 포기하고 취미로 남기자 했죠. 스물한 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고, 군대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일했어요.”

–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나요.

“대장간에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후계자 구하느라 어려움 겪는 걸 많이 봤어요. 심지어 저랑 같이 일하다가 다음 날 갑자기 출근하지 않은 분도 있었어요. 2~3주면 연마 기술을 배울 수 있겠다 싶어서 왔는데 들어와서 일하다 보면 금방 끝날 게 아니니까 사라지는 거죠. 사람들은 시간 투자할 생각이 없어요. ‘나 아니면 이어갈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옆에서 보니까 자식밖에 할 사람이 없겠더라고요. 내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육십, 칠십 살이 되도 젓가락 들 힘만 있으면 일할 수 있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요. 이게(돈) 벌리는 걸 보기도 했고. 저, 현실적인 사람이에요."(웃음)

– 계속 서울에서 일했나요.

“아버지가 ‘공장 들어가서 기초부터 배우라’고 하셨어요. 대전 대장간에서 연마 자세 연습만 1년을 했어요. 그렇게 6년을 수련했지요. 3년 전 아버지가 다리 수술로 자리를 비우셔야 했을 때부터 대타로 들어가서 서울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서울 노량진수산시장 주차장 3층에 있는 한밭대장간 매장 앞에 선 전종렬씨./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칼은 어떻게 해야 잘 가나요.

“반복 숙달.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우고 반복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이 쌓여야 해요. 처음에는 막칼로 시작해요. 이게 잘되면 주방 칼로 올라가요. 이걸로 연습하다가 잘되면 사시미 칼(생선회 칼)로 가요. 그것도 잘하면 하이스강(고경도 특수강) 등으로 만든 칼로 가요.”

– 칼 갈다가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도 두 번 겪었다고요.

“칼은 원칙대로 갈아야 해요. 그런데 나쁜 습관이 든 거예요. 빨리 갈려고 요령을 부리다가 삐끗해서 손가락을 다쳤죠. 연마 기술을 마스터하고 나서 요령을 피우면 되는데, 저는 뭣도 모르는 상태에서 요령을 피웠고, 그게 잘못해서 습관이 된 거죠. 잘못 몸에 밴 습관이 지금도 몸에 조금씩 남아있어요. ‘아 이렇게 갈면 안 되지’ 생각하면서 칼을 갑니다.”

– 아버지에게도 여쭤본 질문입니다만, 칼을 보면 주인 성격을 알 수 있나요.

“다 나오죠. 사시미 칼은 한 날이잖아요.(일본 생선회 칼은 칼날을 한쪽 면만 세운다) 성격 급한 요리사는 양쪽 다 세워요. 칼이 개판 돼서 오면 사람도 개판이에요. 칼날 선이 하나도 망가지지 않은 칼을 가져오는 분들은 차분하고 매너 있으세요.”

– 손님은 주로 요리사인가요.

“일식당, 막회 집, 급식소, 교회, 족발 집, 보쌈 집에서 많이 오세요. 주부도 있어요. 조리 중·고교 학생도 많이 와요. 그 학생들에게 잘하면 친구들이 다 와요.”

– 제일 짜증 날 때는 언제인가요.

“손님이 오셔서 ‘아버지 어디 가셨어’ 묻거나, ‘아버지 때는 안 이랬는데’라고 할 때요. 3년째 혼자 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러세요.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참고 참다가 너무 쌓이면 ‘그러면 아버지한테 가세요. 없는 사람 찾지 마시고요’라고 말해요. 물론 웃으면서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면 10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부탁해서 아버지가 오시잖아요? 그러면 손님들이 그날 하루 본 것만 가지고 ‘아버지 또 오시는구나’ 생각해요.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한테 SOS 안 쳐요.”

– 아버지가 간 칼과 아들이 간 칼, 차이가 있나요.

“칼 갈면서 아버지와 다른 나만의 개성을 만들고 싶었어요. 마감 퀄리티(품질)를 다르게 합니다. 아버지가 간 칼을 보면 마감이 아주 좋지는 않아요. 반들반들하지 않아. 저는 새 칼처럼 보이게 마감해요. 특히 비싼 칼은 반짝반짝 거울처럼 빛나게 경면(鏡面) 처리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손님들이 좋아하죠. 아,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마이웨이(my way)’예요. ‘내가 하는 게 맞으니까 너희는 따라서 해’ 이런 게 있어요. 저는 ‘타협’입니다. 일단 손님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요. 그러고 나서 반박을 하죠. ‘제 경험상 제 방식대로 하면 이런 점이 좋다’고 하지, 제가 절대로 옳다고 말하지 않아요. 최대한 타협점을 찾아서 해드려요. 손님들의 만족도가 높아지죠.”

대장간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

전종렬씨가 지난주 금요일(4일) 대전에 갔다. 서울 노량진시장 매장은 최근 수도권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당분간 일주일에 사흘(월~수요일)만 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오랜만에 만났다.

– 아버지가 보기에 아들의 연마 실력은 어느 수준입니까.

“거의 내 수준이지. 아들과 내가 성격이 다르잖아. 성격 차이에 따라 칼 가는 스타일이 다르다 뿐이지 기술은 나와 비교했을 때 99.9%까지 올라왔지.”

– 아버님의 목표나 꿈은 뭔가요.

“고급 칼 국산화. 시중에서 50만원대에 유통되는 칼을 ‘한칼’ 브랜드로 만들어서 30만원대로 낮추는 거지. 거의 완성 단계에 왔어.”

전만배씨가 신문지로 둘둘 만 물건을 가져왔다. 신문지를 펼치자 자루가 박히지 않은 미완성 칼 두 자루가 나왔다. “일본산 VG-10으로 만든 칼이야. 일본 최고급 칼 브랜드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강이지. 이거 완성하고 나면 파우더스틸(powder steel)로 100만원대 초고가 칼을 만들 거야.” 파우더스틸은 합금 재료가 되는 금속을 미세하게 갈아 열과 압력으로 압축해 내구성 높은 금속이다.

– 아드님의 목표나 꿈은 뭔가요.

“칼 만드는 과정은 쇠를 때려서 대강 형태를 잡는 ‘함마(해머·hammer)’, 칼 모양을 잡고 전 과정을 총괄하는 ‘대장’, 그리고 연마 3단계로 크게 나눠요. 대장간을 계속하려면 모든 과정을 알고 원천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 아드님의 목표에 아버님도 동의하세요.

“아들이 10년 동안 충분히 벌어놓고 유럽이건 미국이건 해외로 나갔으면 좋겠어. 그쪽에선 칼갈이가 최고 전문 직종이잖아. 하지만 우리처럼 칼 가는 건 세계 어디에도 없어. 우리 연마 기술을 보여주고 돈도 벌고 성공했으면 좋겠어.”

– 어쨌건 가업을 물려줄 수 있으니 행운이네요.

“그렇지. 이어갈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