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모(42)씨는 취침 전에 불을 끄고, TV를 틀어 ‘서울의 달’ 한 편을 보고 잔다. 1994년 방송한 김운경 원작의 이 드라마는 달동네를 배경으로 서울에 사는 소시민들의 삶을 그려냈다. 최민식·한석규·채시라 등이 출연해 시청률 50%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5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명품 드라마’로 꼽힌다.
요즘 30여 년 전에 방영했던 1990년대 드라마를 방영하는 케이블TV 드라마 채널이 인기다. ‘서울의 달’을 비롯, ‘아들과 딸‘ ’엄마의 바다‘ ‘모래시계' ‘첫사랑’ 등이 대표적이다. 최수종·채시라·최민수·고현정처럼 지금은 중년이 된 배우들이 당시 청춘 스타였다. 90년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을 내보내는 ‘MBC ON’은 지난달 채널 전체 시청률(전국 유료 매체·가구 기준) 0.29%를 기록했다. 90년대 드라마를 집중 편성해 내보내는 드라마 채널 ‘엣지TV’가 올해 방영한 ‘아들과 딸’도 시청률이 0.32%였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은 평균 시청률 0.2%가 넘으면 지상파나 종편, 보도 채널을 제외한 채널 가운데 최상위 수준이다.
온라인에서도 인기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아들과 딸' 56회의 일부 영상은 조회 수가 18만이나 된다. 해당 회차는 극중 주인공 김희애(후남 역)와 한석규(석호 역)가 결혼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웨이브는 90년대 드라마를 비롯해 과거 드라마 수요가 커지자 ‘클래식관‘을 만들어서 예전 드라마를 공급하고 있다. 김용배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은 “중장년층의 인터넷 사용이 늘면서 90년대 드라마가 더욱 인기를 끄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사실 지금 눈높이로는 화질과 음질도 열악하다. 물론 줄거리와 결론도 뻔하게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2020년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이 첫손으로 꼽는 이유는 ‘복고(復古)’다. 최근 제작하는 드라마가 너무 다양한 소재·복잡한 구조인 데 반해, 90년대 드라마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예를 들어 과거 멜로드라마는 ‘두 남녀 주인공이 연애한다. 방해 요인이 발생한다. 이를 뛰어넘어 결혼해 드라마가 끝난다’처럼 어떤 틀이 있어 편하게 볼 수 있는 데 반해 요즘 드라마는 작가나 PD가 취재를 통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이해하기 어렵다”며 “90년대 드라마는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워 눈이 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복고에 대한 선호”라고 분석했다.
특히 인기를 끄는 드라마는 ‘전원일기’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MBC ON’에서 방영한 ‘전원일기’는 지난달 평균 시청률이 0.79%를, 최고 시청률은 1.35%를 기록했다. 주중 하루 두 차례 전원일기를 방영하는 엣지TV도 올해 방영한 자체 드라마 가운데 최고 시청률(0.5%)을 기록했다. 엣지TV 허기석 상무는 “젊은 시청자들이 유튜브 등으로 옮겨가면서 케이블 방송의 주 시청자 나이가 갈수록 올라가고 있다”며 “전원일기는 우리나라 전통이 나오고, 편안하게 볼 수 있다 보니 시청률이 잘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90년대 드라마가 상대적으로 문학·예술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안동대 융합콘텐츠학과 김공숙 교수는 “90년대만 해도 지금보다는 시청률에 대한 압박을 덜 받았기 때문에 드라마 PD와 작가들이 예술가적 소신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며 “이 때문에 ‘여명의 눈동자’나 ‘아들과 딸’처럼 문학적 감성을 잘 담은 작품이 많다”고 말했다.
90년대 드라마 제작 여건이 지금보다 자유로웠던 점을 꼽기도 한다. 과거 드라마 작가로 일했던 한 인사는 “지금은 드라마 한 편에 광고주나 배우, 연예 기획사 등이 돈과 시청률에 워낙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작가가 극본을 내놓더라도 작품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90년대는 작가들이 소신껏 할 수 있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20~30대 젊은 층의 관심도 인기에 한몫한다는 해석도 있다. 드라마를 만들던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20~30대가 이른바 ‘뉴트로(새로운 복고)’를 즐기는 차원에서 90년대 드라마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달 MBC ON 채널에서 방영한 ‘전원일기’는 30대 남성의 평균 시청률이 0.5%였고, 최고 시청률은 1.41%를 기록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젊은 시청자들은 90년대 드라마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코드가 담겨 있는 문화 콘텐츠로 소비하면서 ‘어 저거 재미있네’ 하고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