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제주시 해안동 한 감귤 농장. 한창 조생(早生) 감귤을 수확할 시기인데 아직 초록빛을 띠는 감귤이 많았다. ‘초록 감귤’을 따 당도를 측정해 보니 출하 기준(9브릭스)보다 높은 13브릭스가 나왔다. 농장을 운영하는 김성은(43)씨는 “적어도 10월 중순부턴 밤 기온이 확 내려가야 감귤 껍질이 노랗게 익는데 올가을은 너무 더웠다”며 “당도가 높아도 색이 들지 않아 상품성이 떨어져 고민”이라고 했다.
제주에 역대 가장 늦은 열대야(밤 최저기온 25도 이상)가 찾아오는 등 늦가을까지 밤 수은주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껍질이 노랗게 익지 않은 제주 감귤이 늘고 있다. 온난화 여파로 과거 볼 수 없었던 아열대 작물이 한반도에 등장하는 동시에 귤처럼 ‘터줏대감’ 작물에도 이상이 생기는 것이다.
보통 감귤 껍질은 초가을까진 초록빛을 띤다. 그러다 가을 찬바람에 껍질 속 엽록소가 분해되며 주황빛을 띠는 카로티노이드 색소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감귤이 노랗게 잘 익는 것을 ‘착색이 됐다’고 말한다. 일평균 기온이 20~25도 사이 따뜻할 때 귤은 새콤달콤해지고, 이후 일평균 기온이 12~13도 사이면서 최저기온은 8도 정도에 머물 때 착색이 일어난다.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확 서늘해야 귤이 맛도 있고 착색도 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올가을(9~11월) 제주도 날씨는 지나치게 더웠다. 특히 밤더위가 심했다. 이례적인 ‘10월 열대야’가 세 차례 발생했다. 특히 지난 10월 13일 열대야는 1923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늦은 열대야였다. 서귀포의 올해 전체 열대야 일수는 총 79일로, 역대 가장 많았다. 1980년대(1980~1989년) 17.7일이었던 제주의 열대야 일수는 2020년대(2020~2024년) 들어 47.8일까지 늘어났다. 10월에도 여름처럼 더웠기 때문에 과육만 익고, 껍질은 초록빛을 못 벗은 것이다.
농민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감귤은 후숙 과정을 거치면 신맛이 줄고 단맛이 올라오지만, 바나나나 망고처럼 껍질 색깔이 진하게 변하지는 않는다. 색이 제대로 들지 않으면 당도가 높아도 상품성이 떨어져 비싸게 팔리기 어렵다. 서귀포에서 감귤 농장을 운영 중인 한 농민은 “과일을 달게 하는 농법은 개발된 게 많지만, 껍질 색깔만큼은 기온에 달려 있어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런 ‘초록 감귤’ 현상은 결국 기후 온난화에 따른 한반도의 아열대화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아열대 기후대에 진입한 곳은 한라산을 제외한 제주 내륙과 일부 남해안 지역으로 보고 있다. 아열대 기후는 8개월 이상 일평균 기온이 10도 이상이고, 가장 추운 달 기온이 18도 이하인 경우를 말한다. 특히 제주는 망고·파파야·올리브 등 아열대 과일 생산 면적이 2018년 117ha(헥타르)에서 재작년 221ha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제주는 겨울철에 찬바람이 불고 추워서 아열대 작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쉽지 않고 한겨울엔 난방을 켜야 해 경제성이 떨어진다. 농민 입장에선 터줏대감 작물은 점점 키우기 어려워지고, 아열대 작물은 한겨울에 재배가 어려운 ‘이중고’를 겪게 되는 것이다.
제주 감귤은 기온뿐 아니라 늘어난 강수량에도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비가 많이 내리면 감귤의 당도는 줄고, 크기가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가 생긴다. 제주도 강수량은 1980년대 연 1664.4㎜에서 2020년대 1739.1㎜까지 늘어났다. 그 결과 실제 상품성이 떨어지는 가로 길이 71㎜를 넘는 큰 감귤이 늘었다.
제주도는 감귤을 노랗게 물들이기를 포기하고 아예 초록을 강조한 새 품종을 개발하기도 했다. 8~9월에 수확하는 극조생(極早生)감귤의 당도를 높여 ‘그린향’이라는 품종으로 개량한 것이 대표적이다. 극조생감귤은 수확 시기가 일러 본래 새콤한 맛이 특징이었는데, 품종을 개량해 한여름에도 단 감귤을 맛볼 수 있도록 했다.
감귤 출하 기준도 색깔이나 크기에서 ‘당도’로 바뀌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해 감귤 전체에서 노란빛이 절반 이상 들어야 출하한다는 ‘착색도 50% 이상’ 기준을 폐지했다. 대신 극조생 감귤의 당도 기준을 1997년 이후 27년 만에 8브릭스에서 8.5브릭스로 올렸다. 또 감귤이 기준 크기(49~70㎜)에 해당하지 않아도 당도가 10브릭스를 넘으면 상품화할 수 있게 했다.
유희동 연세대 대기과학과 교수는 “현재 수준으로 경제 발전이 지속돼 탄소를 많이 배출하면 2050년에 한국은 절반 이상이 아열대화된다”며 “지금 같은 ‘아열대 과도기’ 상태에서 ‘초록 감귤’과 같은 현상은 사회 곳곳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