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마트에서 축축한 축·수산물을 감싸거나 국물 있는 배달 음식을 포장할 때 흔히 쓰이는 PVC(폴리염화비닐) 소재 랩이 환경오염 문제로 2024년부터 전면 퇴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퇴출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될 상황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PVC 랩을 대체할 국내 제품의 성능 검증, PVC 랩 생산 업체에 대한 지원 등 조건이 달성되면 규제를 실행하겠다”는 입장이나, 규제 이행을 위한 구체적 계획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4일 환경부에 따르면, 2024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PVC 랩 사용 금지’에 대해 환경부는 “현재로선 규제 실행 시점을 못 박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PVC 랩은 방수성과 포장 편의성이 높아 ‘포장의 대명사’로 통했다. 하지만 재활용이 불가능하고, 태울 때 염소가 배출되는 반(反)환경적 소재라 정부는 2019년 PVC 랩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다만, 연 매출 10억원 미만 영세 업체 또는 축·수산물 등 PVC 랩 대체재가 미흡한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 때문에 많은 음식점과 각종 축·수산물 유통에서 PVC 랩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환경부는 PVC 랩을 이런 업종에서도 퇴출시키기 위해 이 예외 조항을 2024년 1월부터는 삭제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환경부는 2019년 친환경 포장재인 ‘PO(폴리올레핀) 랩’ R&D(연구·개발)에 착수했다. 당시에는 상품성을 갖춘 PO 랩이 일본산만 있어서 국산 제품의 경쟁력을 키우는 게 선결 과제였다. 연구·개발은 기존 PVC 랩 생산 업체인 삼영화학이 맡았다. 현재 국내에는 6개 업체가 PVC 랩을 생산 중인데, PO 랩 기술력이 해외 수준까지 올라가면 PVC 랩 전면 금지 이후 이 업체들이 소재만 바꿔 계속 랩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정부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막상 PO 랩을 써본 현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환경부가 PVC 랩을 금지하면서 제휴를 맺은 대형 마트에 PO 랩 사용을 권장했는데, PO 랩을 써본 곳들은 불편하다며 비닐봉지 등 아예 다른 포장재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산과 비교해 쉽게 습기가 차는 등 성능적으로 여전히 부족했던 부분도 PO 랩 전환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이후 연구가 계속됐고, 현재 국산 PO 랩은 일본산과 거의 근접한 수준으로 올라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PO 랩의 성능은 ▲강도 ▲늘어나는 정도 ▲투명도 ▲습기를 막는 정도 ▲점착력(포장재에 달라붙는 정도) ▲롤 풀림성 등 6개로 판단한다. 그런데 일본 제품과 비교해 점착력은 80~90% 수준으로 다소 못 미치지만 다른 성능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가격 경쟁력도 갖췄다고 업계는 주장한다.
하지만 PO 랩 사용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PO 랩에 대한 확신이 없던 환경부가 PVC 랩 전면 규제에 모호한 입장을 보이자, PVC 랩 생산 업체들 사이에서도 전열을 이탈하는 업체가 나오고 있다. 업체 가운데 한 곳은 PVC 시장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오히려 PVC 랩 생산 규모를 늘렸다.
종이컵 등 일회용품 사용 규제에 적극적이던 환경부가 PVC 랩에는 소극적인 것은 고려 사항이 복잡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PVC 랩을 전면 규제하면 영세한 PVC 랩 생산 업체가 도산할 우려가 있고, PO 랩의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제부터 할 경우 일본산의 시장 잠식 우려를 걱정해야 한다. 게다가 PVC 소재는 대기업이 주로 생산하는데 랩 규제 이슈가 건축자재 등으로 옮아붙어 PVC 산업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
일단 환경부는 “국산·일본산 PO 랩에 대한 공개 성능 비교를 통해 대체품으로서 성능이 확실하게 증명된다면 PVC 랩 규제를 당초 계획대로 시행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형 마트 등 실제 랩을 다량 사용하는 업계의 평가를 받아보자는 취지다. 또 기존 PVC 랩 생산 업체가 업종을 변경하거나 공장 설비 등을 바꿀 수 있도록 지원금 편성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년도 예산에 이들 업체에 대한 지원금은 하나도 편성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현재로선 PVC 규제가 계획대로 진행될지 아닐지 어떤 답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