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전북 무주군 적상면.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넘자 해발 600~800m 산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차창을 열자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최근 현대로템이 2034년까지 3000억원을 들여 ‘항공우주 기지’를 세우겠다고 발표한 곳이다. 골짜기마다 시설을 짓는데 전부 합치면 축구장 107개와 맞먹는 76만㎡(약 23만 평) 규모다.
산 아래 무주 읍내는 축제 분위기였다. 길목마다 ‘현대로템의 무주군 투자를 뜨겁게 환영합니다’ ‘무주의 미래를 바꾸는 항공우주기업 현대로템’이라고 쓴 현수막이 펄럭였다. 주민 박천우(58)씨는 “무주에 이런 큰 기업이 들어온 건 처음”이라며 “무주 주민 전체가 기대에 차 있다”고 했다. 이해근(57)씨는 “무주가 한국의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가 되는 것 아니냐”며 “똑똑한 청년들이 몰려오면 좋겠다”고 했다.
현대로템은 방산 업체가 모인 경남 창원과 우주항공청이 있는 사천을 두고 왜 무주 산골에 3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을까. 현대로템 관계자는 “적상면의 지형을 보고 단번에 투자를 결정했다”고 했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싸 그 자체로 요새 같았습니다. 자연 방호벽이 따로 없지요. 보안이 생명인 국가 전략 시설을 짓기에 딱이었습니다.” 현대로템 실사단에선 “북한도 미사일로 타격할 수 없겠다”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적상면의 산악 지형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조선은 전국 5곳에 사고(史庫)를 지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는데 그중 한 곳이 ‘적상산’에 있다. 전영순 무주군 홍보팀장은 “숱한 전란 속에서도 실록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건 무주의 깊고 험한 지형 덕분”이라고 했다.
현대로템은 이곳에 기지를 세워 우주 로켓과 차세대 미사일 등을 개발할 계획이다. 시험 과정에서 소음과 진동이 클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전북도 관계자는 “소나무 숲이 소음과 진동을 흡수하고 단단한 돌산이 방음벽 역할을 한다”고 했다. 주변에 민가도 거의 없다.
장원준 전북대 첨단방위산업학과 교수는 “지반이 단단해 발사 시험의 오차도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첨단 우주 산업을 키울 최적의 입지”라고 했다. 부지의 80%가 무주군 소유라 부지 매입에도 유리하다.
로켓은 철보다 10배 강하면서도 무게는 4분의 1 수준인 ‘탄소섬유 복합재’로 만든다. 그 공급처인 ‘HS효성첨단소재’가 무주에서 서쪽으로 1시간 거리인 전주에 있다. 전주에는 2027년 준공을 목표로 ‘탄소 소재 국가산업단지’도 조성하고 있다.
무주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인 대전에는 한국 항공우주·방위 산업의 ‘두뇌’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국방과학연구소가 있다. 전북도 관계자는 “무주 기지가 들어서면 ‘대전(설계)-전주(소재)-무주(테스트)’를 잇는 우주 산업 생태계가 완성된다”며 “무주가 오지(奧地)인 것 같지만 필요한 건 다 갖춘 요지인 셈”이라고 했다.
전북도와 무주군은 오래전부터 우주·방위 산업 기업 유치에 공을 들였다. 유치 팀을 만들고 전북대에 국내 최초로 첨단방위산업학과를 개설했다. 현대로템엔 ‘기회발전특구’ 지정과 세금 혜택 등을 약속했다. 기회발전특구에 들어오는 기업은 5년간 법인세와 소득세를 100% 면제받는다. 무주군은 지난 9일 부군수를 단장으로 ‘항공우주산업 투자 지원 TF’를 출범했다. 무주군 관계자는 “필요한 행정 절차를 원스톱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현대로템은 지난해 폴란드와 8조7000억원 규모의 K2 전차 수출 계약을 체결한 방산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 5조8390억원, 영업이익 1조56억원을 올렸다. 수주 잔고가 30조원에 달한다. 현대로템은 이번 투자를 통해 항공우주 분야로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핵심은 ‘우주 발사체용 메탄 엔진’ 개발이다.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우주 기업 ‘스페이스X’가 개발에 성공한 메탄 엔진은 우주 산업의 개념을 바꿀 혁신으로 통한다. 기존 등유 엔진은 그을음이 심해 한 번 쓰고 버려야 하지만 메탄 엔진은 그을음이 남지 않아 여러 번 쓸 수 있다. 발사 비용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차세대 미사일에 탑재할 ‘이중 램제트’ 엔진도 개발한다. 이 엔진을 장착하면 마하 3 이상 극초음속으로 날 수 있다.
현재 무주는 ‘지역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 관광 외에 다른 산업 기반이 없다 보니 1970년대 7만명이었던 인구가 2만3000명으로 줄었다. 재정 자립도는 8.4%로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현대로템이 투자하기로 한 3000억원은 1990년대 초 덕유산리조트(3800억원) 이후 30여 년 만에 최대 규모다. 황인홍 무주군수는 “적상면 일대에는 현대로템 외에 협력 업체 10여 곳이 동반 입주할 예정”이라며 “침체한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전북도는 적상면 일대의 도로를 넓히고 도시가스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주민 전현석(63)씨는 “눈만 내리면 고립되기 일쑤였는데 훨씬 편해질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