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강원 영월군 서강(西江) 선착장에서 청령포행 배를 타려는 관광객이 줄을 섰다. 평일 오전인데도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아왔다. 청령포는 조선 단종의 유배지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담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인기를 끌면서 청령포를 직접 보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장경식 기자

“영화에서 단종이 뗏목을 타고 이 강을 건너던 장면이 떠올라요.”

5일 오전 강원 영월군 영월읍 서강(西江) 선착장. 청령포(淸泠浦)행 배를 기다리던 최민정(45·경기 성남)씨가 청령포를 휘감아 도는 강물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실제로 와보니 이런 오지가 따로 없다”며 “어린 왕이 이런 곳에 있었다니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청령포는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다. 삼면이 강으로 막혀 있다. 뒤쪽엔 높이 400m 절벽이 우뚝 서 있다. 그래서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린다. 예나 지금이나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인기를 끌면서 전국에서 청령포를 직접 보려는 사람이 몰리고 있다.

이날은 평일인데도 청령포행 배를 타려는 관광객이 길게 줄을 섰다. 140대 규모 주차장은 빈 자리가 없었다. 42인승 배가 쉴새 없이 강을 오갔다. 매표소 직원 김은영(55)씨는 “영화가 개봉한 이후 평일엔 2000명, 주말엔 6000명이 찾는다”고 했다. 원래는 붐비는 날에도 방문객이 700~800명 정도였다고 한다.

1천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에 힘입어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찾는 방문객의 발길도 줄을 잇고 있다. /영월군

영화는 지난달 4일 개봉한 이후 누적 관객이 959만명을 넘었다. 1000만명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기자도 관광객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강 폭은 약 80m, 수심은 깊은 곳이 3~4m다. 헤엄쳐서 건너기 쉽지 않다. 배는 1~2분 만에 청령포에 도착했다. 자갈밭을 지나 울창한 소나무 숲 안으로 들어가자 단종이 머물렀던 ‘단종어소(端宗御所)’가 나타났다. 이 집은 2000년 복원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집터가 원래 자리다. 넓이가 약 10㎡(3평)다.

단종이 기대어 슬픔을 달랬다는 관음송,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망향탑, 한양 쪽 하늘이 보이는 전망대인 노산대도 남아 있다.

관광객들 표정은 대부분 어두웠다. “감옥이 따로 없다”는 말이 나왔다.

봄날에도 청령포는 쌀쌀했다. 절벽에서 찬 ‘골바람’이 불었다. 영화에서 촌장 엄흥도(배우 유해진)는 청령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여름에는 습기가 많고 산모기가 들끓는데다 겨울에는 강가에 냉기가 올라오고 절벽에서는 한기가 내려온다. 사람이 살기에는 아주 그냥 죽을 맛이다.”

2026년 3월 5일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장릉의 모습. /장경식 기자

주민 유현재(61)씨는 “청령포는 강원도 영월에서도 추운 곳”이라고 했다. 청령포란 이름도 청랭포(淸冷浦)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화는 청령포에서 약 3.5㎞ 떨어진 곳에서 찍었다. 강가에 세트장을 만들고 절벽 등은 CG(컴퓨터그래픽)로 그렸다고 한다.

청령포를 둘러본 관광객들은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장릉(莊陵)’으로 향했다. 1457년 열일곱 나이에 생을 마감한 단종이 묻힌 곳이다. 당시 조정에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는 어명을 내렸으나 엄흥도가 몰래 시신을 거둬 자기 선산에 묻었다고 한다.

장릉은 영월 동을지산 중턱에 있다. 해발 270m 지점이라 등산하듯 올라가야 한다. 이갑순 영월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조선 왕릉 중 서울·경기 밖에 자리한 왕릉은 장릉뿐”이라며 “이렇게 산 중턱에 있는 경우도 유일하다”고 했다. 규모는 다른 조선 왕릉의 3분의 1 수준이다. 임금의 표석도 없다. 관광객 김철민(34·인천)씨는 “왕위를 빼앗기고 첩첩산중에서 세상을 떠난 단종이 자꾸 생각나 왔다”며 “단종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기도했다”고 했다.

5일 강원 영월군 청령포를 찾은 가족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한옥이 단종이 머물렀던 집이다. 2000년 복원했다./장경식 기자

영월군에 따르면, 지난달 4일 영화 개봉 이후 한 달간 청령포와 장릉을 찾은 관광객은 8만4000명이다. 지난해 연간 방문객(26만3000명)의 32%가 한 달 만에 몰린 것이다. 주민 김주철(65)씨는 “여긴 원래 한산한 시골인데 평일에도 북적인다”며 “영월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

침체한 지역 상권에도 활기가 돌고 있다. 영월읍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는 박춘복(58)씨는 “요즘 ‘영화 보고 왔다’는 손님이 많다”며 “단종이 영월 경제를 살리고 있다”고 했다. 마땅한 산업이 없는 영월은 해마다 인구가 줄어 ‘지역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 1970년대 12만명이었던 인구가 올해 3만5000명대로 줄었다.

다음 달 24~26일 영월 동강 일대에서 ‘단종문화제’가 열린다. 1967년 단종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축제다. 단종의 국장(國葬) 행렬을 볼 수 있다. 단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왕이다. 지난해 관광객 10만2000명이 축제장을 찾았다. 영월군 관계자는 “올해는 축제 규모를 더 키워 단종과 정순왕후의 혼례도 재현할 계획”이라고 했다.

5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청령포 전경. /장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