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기연구원 직원들이 차세대 전력계통운영시스템(EMS)을 살펴보고 있다. /KERI 제공

“실험실에 갇힌 기술은 죽은 기술입니다. 산업 현장에서 공정을 혁신하고, 기업 매출을 올리며,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기술은 생명을 얻습니다.”

지난달 29일 경남 창원시 리베라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미래 산업 전략 심포지엄’에서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전기연구원(KERI)의 김남균 원장은 ‘기술 사업화’를 화두로 던졌다. 연구를 위한 연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산업 현장에 적용해 국가 산업의 구조를 바꾸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25일 본지와 만난 김 원장은 “모든 일상이 전기로 통하는 ‘전기화(Electrification)’ 시대를 맞아 ‘큰 기술’ 개발을 통해 국가 산업 발전과 국민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KERI의 목표”라고 말했다. 여기서 ‘큰 기술’은 국민이나 인류에 실질적인 이익을 주거나 산업적 파급 효과가 커 100억~1000억원대 기술료 수입이 가능한 기술을 의미한다. 단순한 특허 등록을 넘어, 산업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AI로 대정전 방지부터 제조 혁신까지

KERI는 제조업 중심인 지역 산업에 인공지능(AI)를 접목하는 데 있어 핵심인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담당하고 있다. 전력계통망은 인체의 ‘핏줄’과 같아 작은 이상도 블랙아웃(대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KERI는 지난 2014년 국가 전력계통을 24시간 감시·제어하는 두뇌 역할의 ‘차세대 전력계통운영시스템(EMS)’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EMS는 발전소와 변전소, 송전 시설의 운영 현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정교한 시스템으로, 대정전 예방에 큰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여기에 AI를 적용해 변동성이 큰 신재생에너지를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관리하는 고도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력망의 안정은 데이터 기반 제조 혁신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노후화와 데이터 부족으로 AI 적용이 어려웠던 ‘공작 기계(Mother machine)’ 분야도 주목했다. 공작기계는 다른 기계를 만드는 기계라는 뜻에서 ‘마더 머신’으로 불린다. 그중 핵심인 ‘CNC(수치 제어반)’는 사람의 작업 방식을 모사해 기계를 제어하는 고난도 기술로, 국내 수요의 90% 이상을 일본과 독일에서 수입하고 있다. KERI는 지난해 총 300억원을 투입해 ‘AI CNC 실증 센터’를 구축했다. 2030년까지 경남 지역 보급 CNC의 50% 이상을 국산화해 연간 3000억원대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두겠다는 목표다.

한국전기연구원이 개발한 친환경 절연가스(K6)가 적용된 초고압 송전급 차단기 앞에서 연구진들이 기기 점검을 하고 있다.

◇재난 안전과 환경 보호 영역에도 KERI 기술

재난 현장과 환경 보호 분야에서도 KERI 기술은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은 ‘실시간 소방 현장 시야 개선 기술’이 대표적이다. 연기와 열기로 시야 확보가 어려운 화재 현장에서 사람과 구조물의 형상을 선명하게 복원한다. 국립소방연구원과 협업해 의료 영상 진단과 수술 장비 화질 개선 기술을 소방 현장에 적용했다. 실제 소방 당국이 훈련한 결과, 현장 대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SF6(육불화황)를 대체할 친환경 절연 가스 개발도 주목된다. SF6는 뛰어난 절연 성능에도 온난화지수가 이산화탄소의 2만3500배에 달한다. KERI는 독성이 없으면서 온난화지수를 획기적으로 낮춘 대체 가스를 개발했고, 현재 국내 전력기기 업체와 상용화를 준비 중이다.

전기차 화재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전고체전지’ 연구도 속도를 내고 있다. 전고체전지는 양극과 음극 사이 이온을 전달하는 전해질을 액체 대신 고체로 바꿔 화재·폭발 위험을 낮춘 배터리다. 다만 고체 전해질 가격이 액체 대비 최대 100배에 달해 상용화에 걸림돌이 됐다. KERI는 이를 저비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불나지 않는 배터리’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차세대 모빌리티의 ‘전기화’ 선도

KERI의 연구 영역은 바다와 우주로도 확장되고 있다. 지난 2015년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구축한 ‘전기선박 육상시험소(LBTS·Land Based Test Site)’는 우리 군(軍)의 전략 자산인 잠수함 건조의 핵심 인프라다. 3000t급 잠수함인 ‘도산 안창호함’ 등이 성공적으로 진수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상 투입 전 전기추진 시스템을 육상에서 검증한 LBTS가 있다.

전기차 에너지 효율을 좌우하는 ‘전력반도체’ 연구도 주도한다. 전력반도체는 전력이 필요한 거의 모든 산업 분야의 핵심 부품이다. KERI는 기존 실리콘(Si)보다 성능이 뛰어난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국산화에 성공했다. 일본·독일 등 일부 국가가 주도하던 분야에서 기술 자립을 이룬 셈이다. 나아가 우주항공 등 극한 환경에서도 견디는 ‘우주·항공용 다이아몬드 전력 반도체’ 개발에도 도전하고 있다. 차세대 모빌리티(이동수단)와 방산, 우주 산업까지 아우르는 ‘전기화’ 전략의 기반을 다지는 행보다.

또 KERI는 로버(Rover) 핵심 부품 국산화 개발에도 참여 중이다. 로버는 행성 표면을 이동하며 지형과 온도 등 환경 조건을 분석하고 자원을 탐사하는 유·무인 차량이다.

김남균 전기연구원장은 “일상은 물론, 국방이나 모빌리티 분야에서도 ‘전기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KERI가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