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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

서울에서 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던 어느 날 여러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간 학문의 장에서 나온 그 말에 의문을 품었다. ‘과연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인가.’ 어릴 적 “공부해서 남 주느냐, 공부하면 그거 다 너의 것이 되는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는 철저히 나에게 귀속되는 것, 나만의 것, 내가 가지는 것, 나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는 교회 목사님도 “여러분, 천국에 가서도 여러분의 지적인 수준, 공부한 내용은 그대로 가져갑니다”라고 설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왜 공부는 그런 것일까. 철저하게 ‘나’만을 위한 공부라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나만을 위한 공부라면 그건 왜 필요할까. 서점에 깔린 그 많은 책이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책은 왜 냈을까. ‘내가 이렇게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 고생을 했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부란 무엇일까. 인공지능(AI) 등장으로 앵무새처럼 외우는 공부는 점차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대학에선 사람을 알기 위해 철학과가 주목받는다. 인간은 이제 어떤 공부를 해야 하며, 인간에게 가치 있는 공부란 무엇인지 돌아볼 때다.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은 “(내가 했던) 공부 그 자체”가 이미 나에게 상(賞)이라고 했다. 노벨상은 그에게 목표도, 성과도 아니었다. 오로지 “공부 그 자체”라고만 했다. 그는 호기심으로 이룬 공부, 인간이기에 가진 최대 특권인 ‘호기심의 발동’으로 공부하고 공부했다. 공자는 ‘예기’편에서 ‘신독(愼獨)’을 말했다.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고 조심한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도덕적이고 바른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태도를 말한다. 내면의 성실함이며 자기관리이며 자기성찰이다.

공부도 그와 같은 것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공부, 누가 보고 있어서 하는 공부, 결과를 공치사하기 위한 것은 결코 공부가 아니다. 스승이 함께 있지 않을 때도 즐거워서 하는 공부, 타인을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닌 타인과 교류하고 나누는 공부, 나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공부, 그것이 공부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그 사이에 신뢰와 신의를 지키며, 부모님이나 어른이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같이 있는 것처럼 관계의 믿음과 약속을 소중히 여긴다.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지식은 차고 넘치다 못해 무궁무진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소크라테스는 세계 성인 반열에 올랐다. 대학의 전공만 봐도 수십, 수백 개에 이른다. 모국어 외 단 하나 언어도 더 습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전 세계 언어는 소수 공동체 언어를 포함하면 6000여 개가 넘는다. 세계에 극히 일부를 인간은 학습하고 공부한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세계에 대해 학습만 할 뿐이다. 공부로 세계 모든 지식을 움켜쥘 수 없다. 인간은 일련의 공부 과정을 통해 사람의 나약함과 사람의 위대함을 배운다. 또 겸손과 성취를 동시에 배운다.

공부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 동시에 홀로 있을 때 역시 세상으로부터 배운다. 또 위대한 거인의 책에서 배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것이다(뉴턴)’.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기본 전제를 제대로 인식할 때, 그에 대한 인식의 전환(metanoia)이 이뤄질 때, 우리 교육은 그제야 진짜 교육의 의미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공부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는 우리 교육이 되길 바란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진짜 공부의 맛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박주희 박사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교육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