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호남 이전’ 논란에 대해 청와대가 “기업 이전은 기업이 판단해야 할 몫으로 (정부 차원에서) 이전을 검토하진 않은 상황”이라고 8일 밝혔다. 이에 따라 한 달간 이어진 논란도 일단락됐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정치권이 수백조원 사업을 놓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소모적 갈등만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이상일 용인시장은 이날 “(청와대 발표로) 혼란이 불식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경기 용인 처인구 일대에 조성 중인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단지다. 사업비만 총 960조원이다. 이 중 삼성전자가 짓는 ‘첨단 시스템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두고 호남 정치권에서 전북 새만금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력을 조달하기 어려운 수도권 대신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새만금에 짓는 게 낫다는 논리였다. 경기도와 용인시민들이 반발하면서 지역 갈등으로도 비화했다.
파문의 발단은 지난달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였다. 그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곧이어 전북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반도체클러스터 새만금유치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들은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새만금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북도민을 대상으로 서명운동도 시작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발언이 논란을 증폭시켰다. 김 장관은 지난달 26일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입주하면 두 기업이 쓸 전기 총량이 원전 15기 분량에 달한다”며 “지금이라도 전기가 많은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호남 지역 민주당 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인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8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김 장관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지방 이전 발언을 환영한다”며 “전기 없는 용인이 아니라, 전기가 흐르는 새만금에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가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 4일 소셜미디어에서 “윤석열 내란을 끝내는 길은 용인 반도체 삼성전자의 전북 이전”이라고도 했다. 안 의원은 앞서 지난달 11일 전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 전북도당도 “‘용인 반도체 삼성전자 전북 이전 특별위원회’를 출범하겠다”며 호응했다. 전북도당 관계자는 “이번이 수도권 일극 체제를 타파하고 호남을 첨단 산업 중심지로 재편할 유일한 기회”라고 했다. 김관영 전북지사 역시 지난 5일 “용인 반도체 공장이 전북에 온다면 바랄 게 없다”며 찬성 의사를 밝혔다.
기후부는 지난달 29일 설명자료를 내고 “김성환 장관의 발언은 대규모 송전망 건설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으로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고 했지만 논란은 진정되지 않았다.
클러스터 이전 요구는 광주·전남으로 확산했다. 이병훈 민주당 호남발전특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은 지난 6일 광주광역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증설할 제조 시설이나 소재·부품·장비 단지는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풍부한 호남으로 분산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기도와 용인시는 반발하고 나섰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지난 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이재명 대통령께서 경기도지사 시절, 국민의 미래 먹거리를 위해 수도권 규제를 뚫고 유치한 역작”이라며 “사업의 불확실성은 줄이고 속도는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상일 용인시장도 지난 6일 입장문을 내고 “클러스터를 지방으로 옮기면 부지 선정부터 예비타당성 조사, 환경·교통·재해 영향 평가까지 다시 해야 해 최소 5~6년은 더 걸린다”며 “중국이 무섭게 추격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허비하면 대한민국 반도체 경쟁력은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용인 시민들이 모인 ‘용인특례시 범시민연대’는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열고 “용인 클러스터 이전설은 시민의 생계와 국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흔드는 행위”라며 “용인 시민 110만 서명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민주당 안에선 ‘집안싸움’이 벌어졌다. 용인 지역구의 이언주·이상식·부승찬·손명수 의원은 지난달 30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성환 장관의 발언은 신중하지 못했다”며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적 주장”이라고 했다.
이번 논란에 대해 전문가들은 “선거철마다 이슈를 던져 판세를 흔들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비슷한 논란이 또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허남주 전 전북도의원(국민의힘)은 “새만금은 정치인들의 공약 실험장이 아니다”라며 “도민들에게 또다시 ‘삼성 유령’을 보여주며 표를 구걸하는 행태는 멈춰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