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경북 경주 시내 황리단길. 평일인데도 관광객 2000여 명이 몰려 북적였다. 경주의 명물인 십원빵이나 황남쫀드기를 든 외국인도 여럿 보였다. 거리 곳곳에는 ‘Do you know Makgeolli(막걸리를 아시나요)’ 등 영어 표지판이 걸렸다. 김재용(49·부산)씨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경주에 들렀는데 외국 거리에 온 것 같다”고 했다. 한식당 직원 김별(26)씨는 “요즘은 미국, 중국, 태국 등 나라를 가리지 않고 매일 10팀 이상 온다”며 “외국어 메뉴판도 만들었다”고 했다.
31일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주가 들썩이고 있다. APEC 참가자뿐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이 몰리면서 침체했던 상권이 살아나고 있어서다. 렌터카 업체와 모텔 등도 모처럼 특수(特需)를 맞았다. 한국관광 데이터랩에 따르면, 10월 1~26일 경주를 찾은 관광객은 480만9338명으로 작년(365만7901명)보다 31.5% 늘었다. 같은 기간 외국인 관광객은 13만4105명으로 20.3% 증가했다.
황리단길의 ‘올리브영’ 매장과 아이스크림 가게는 ‘레빗(미 백악관 대변인) 효과’를 보고 있다. 이날 찾은 올리브영 경주황남점은 관광객 30여 명으로 붐볐다. 전날 캐럴라인 레빗 대변인이 들러 화장품을 사 간 곳이다. 레빗 대변인이 소셜미디어에 화장품 ‘인증샷’을 올려 화제가 됐다. 매장 직원은 “손님 10명 중 6명이 외국인 관광객”이라며 “레빗이 사 간 화장품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외국인 관광객은 마스크팩과 선크림을 가장 많이 사 간다고 한다. 전날 레빗 대변인이 들렀던 아이스크림 가게 ‘프로즌 브라이드’에도 관광객이 5m가량 줄을 섰다.
경주 지역의 렌터카 업체 30여 곳은 차량이 전부 동났다. 한진렌터카 관계자는 “보유한 차량 20대가 풀가동 중”이라며 “외국인 관광객들이 차를 빌려 경주 주변까지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경주 시내에서 모텔을 운영하는 박용수(49)씨는 “매출이 30% 이상 늘어 일할 맛이 난다”며 “APEC 행사를 계속 열면 좋겠다”고 했다. 근처 세탁소 업주 이모씨는 “정장이나 와이셔츠를 다리려는 외국인 손님이 밀려와 동네 손님 빨래를 못 하고 있다”고 했다.
APEC은 관광객뿐 아니라 집회 참가자도 불러 모은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전날 경주 곳곳에선 집회 8개가 열려 전국에서 5300여 명(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경주를 찾은 이날 동물보호단체 회원 40여 명이 황리단길 근처에서 ‘푸바오 구출 대작전’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멸종위기 동물인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돌아간 뒤 열악한 환경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2020년 국내에서 태어나 관심을 모았던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는 지난해 중국으로 반환됐다. 대릉원 근처의 한 식당 직원은 “조용했던 경주가 모처럼 떠들썩하다”며 “집회 참가자들도 경주시민들한테는 고마운 손님”이라고 했다.
해가 진 뒤에도 축제 분위기가 이어진다. 매일 밤 경주 대릉원, 첨성대 등에서 미디어아트 공연이 열리고 있어서다. 이날 오후 7시쯤 첨성대에는 관광객 500여 명이 모였다. 첨성대를 캔버스 삼아 빛으로 별자리 등을 연출했다.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20일부터 9일간 첨성대 미디어아트를 즐긴 관람객은 1만2000명으로 집계됐다. 지난 24일 시작한 대릉원 미디어아트 공연은 6만1000명이 감상했다. 지난 29일 밤 월정교에서는 한복 패션쇼도 열렸다. 월정교 아래를 흐르는 남천에 런웨이를 만들었다. 이 이색 패션쇼엔 1만1000명이 모였다.
이날 만난 관광객들은 “APEC을 계기로 경주를 알게 됐다” “다음에 또 들르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서 온 이부키 료(34)씨는 “그동안 서울, 부산만 다녔는데 APEC 덕분에 경주를 발견했다”며 “내년 봄에 가족과 함께 또 오려고 한다”고 했다. 첨성대에서 만난 최미영(47)씨는 “정상회의가 끝나면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국가주석 등이 다녀간 힐튼호텔, 국립경주박물관 등을 천천히 다시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말 KTX 표는 APEC 행사 이후인 11월 초까지 거의 매진이다. APEC 준비기획단은 지난 24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KTX를 이용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을 1만5491명으로 추산했다. SK렌터카 경주지점 관계자는 “APEC이 끝나는 11월 1일 이후에도 일주일가량 예약이 꽉 차 있다”고 했다. 김남일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은 “APEC을 계기로 경주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며 “정상회의 장소를 그대로 재현해 공개하는 등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미디어아트 공연도 당분간 계속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