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인 벽안(碧眼)의 가톨릭 선교사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4월 제주 서쪽 한림읍에 내렸다. 그리고 오늘까지 60년을 머물렀다. 그는 제주 사람들에게‘그거 안 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황무지를 개척해 돼지와 양을 기르고 제주도민 자립을 위한 일자리를 계속 만들어 냈다./사진작가 준초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희생, 헌신, 열정을 높이 기린다.”

‘푸른 눈의 돼지 신부’라고 불렸던 고(故) 임피제(본명 패트릭 J.맥그린치, Patrick James McGlinchey) 신부 기념관이 제주에 들어선다.

11일 제주도에 따르면 최근 공개한 ‘등록문화재 한림성당 종탑 임피제 신부 기념관 조성 타당성 조사용역’ 최종보고서를 토대로 임피제 신부의 기념관을 조성할 예정이다. 용역을 수행한 ㈔제주역사문화진흥원은 임피제 신부 기념관은 한림지역뿐만 아니라 제주를 위한 그의 희생, 헌신, 열정을 배우는 역사문화교육의 장이며, 종교와 지역민과의 유대 강화를 통한 공동체 의식 함양의 장, 복합문화 향유의 장으로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기념관은 6.25전쟁 직후 임피제 신부가 부임했던 제주시 한림읍 한림성당에 마련된다. 지난해 6월 한림성당의 옛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한림성당의 종탑을 중심으로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종탑 인근에 있는 한림성당 수녀 기숙사동을 활용해 기념관 건물을 만들고, 외부공간도 기념관 시설로 활용한다.

전시자료는 임피제 신부의 활동사진과 유품 등을 데이터베이스(DB) 자료로 구축한 뒤 조사, 연구, 교육에 활용하며, 특히 제주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한림성당의 옛 종탑과 연계해 한림지역의 가톨릭 교세 확산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용역진은 성이시돌센터에서부터 새미은총의 동산-금악성당-글라라수녀원-월대 옛터(4·3유적, 비석거리)–문수동 4·3성–명월대-명월성지–한림성당을 잇는 약 13.5㎞의 ‘임피제길’ 조성안도 제안했다.

맥그린치 신부가 양털로 짠 옷을 만들던‘한림수직’직원들에게 편물 짜는 법을 지도하는 모습.‘ 제주 젊은이들이 일자리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자’는 목표로 세운 이 회사엔 한때 1300여명이 근무했다./임피제(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 제공

임피제 신부는 6·25전쟁 이후 제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부다. 1928년 6월6일 아일랜드 도니골 주 래포에서 태어난 그는 1951년 성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1953년 전쟁으로 패허가 된 우리나라로 파견됐다.

임 신부가 제주에 온 것은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1954년 8월 당시 한림공소가 한림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임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됐다. 제주 한림읍에 자리를 잡은 임 신부는 그 후 평생을 제주에 머물며 제주발전에 이바지했다. 특히 제주도민들의 경제적자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임 신부는 한림성당 부임 이후 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4H클럽’을 만들었다. 청소년은 물론 제주지역 젊은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성격이었다. 임 신부는 이 때 고향 가족들이 보내 준 후원금으로 양 35마리를 구입한 뒤 한림성당 뒤뜰에 우리를 만들고, 학생들이 이를 기르도록 했다. 이어 양털로 실을 짜서 양말 등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또 한때 전국최고의 명품으로 각광을 받았던 한림수직의 전신인 직조강습소를 만들어 1300명의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후 돼지와 닭 등을 구해 한림읍 금악리 정물오름 인근에 돼지우리를 만들고, 닭과 돼지 종자를 나눠주는 ‘가축은행’을 설립하면서 ‘돼지 신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61년에는 현재의 이시돌목장인 ‘한림목장’ 등을 설립, 목초지 개량 사업과 각종 가축 사육 등에 나섰다. 동시에 다양한 농기구 사용과 정비 기술 등을 교육하는 등 제주지역 영농 개선과 농촌 생활 부흥에 큰 기여를 했다. 이시돌목장은 우리나라 최대 목장으로 성장한다.

1960년대 말 이시돌 농촌개발협회가 기른 돼지를 홍콩으로 수출하는 모습./임피제(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

특히 1962년에는 제주 최초로 ‘한림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제주도민들의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같은해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를 설립해 제주축산업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64년간 제주근대화 및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0년에는 ‘성이시돌복지병원’을 개원, 제주시 서부권 지역 저소득층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호스피스 병동을 중심으로 다시 개원해 가난한 말기 암 환자와 요양이 필요한 무의탁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1960년대 제주도내에 ‘테시폰’이라는 건축물을 남기기도 했다. 바람이 많은 제주땅에 알맞은 건물 모형을 연구한 끝에 테시폰 건축물을 보급하면서 제주는 물론 국내 근현대사 건축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현재 제주에 남아 있는 테시폰 2동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한림읍 금악리 테시폰의 모습./제주도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에는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았고, 1975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2014년에는 한국과 아일랜드 양국 정부로부터 각각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통령상을 수여받기도 했으며 2018년 4월23일 숨을 거둔 이후 같은해 6월5일 대한민국 명예국민증이 추서됐다.

명예국민증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경제적 자립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헌신하신 귀하의 고귀한 봉사 정신을 높이 기리고, 대한민국과 맺은 소중한 인연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