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경찰청은 청사 안에 '추모의 벽'을 만들고 2002년 9월 추석 명절 근무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순직한 백선기 경사를 추모하고 있다. 백선기 경사는 사후 경위로 1계급 특진했다./뉴스1

지난 2002년 9월 20일 0시50분쯤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암2파출소에서 근무 중인 백선기(당시 54세) 경사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범인은 백 경사가 허리띠에 차고 있던 실탄 4발과 공포탄 1발이 든 38구경 권총을 가지고 달아난 상태였다.

이날은 추석 연휴 첫날이었다. 당시 금암2파출소에선 추석 특별 경계근무로 3명은 도보순찰, 3명은 112차량 순찰 중이었다. 홀로 파출소에 남아 있다 살해당한 백 경사는 순찰을 나갔다 돌아온 동료에게 발견됐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야 할 방범카메라는 작동하지 않았다.

경찰은 범인이 총기를 탈취해 간 점으로 미뤄 추석을 맞아 금융기관을 털기 위한 목적의 범행으로 추정했다. 백 경사의 목과 가슴 등 6곳이 예리한 흉기로 찔린 점에 비추어 원한에 의한 범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전과자 등 수십명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시작했다. 사라진 총기가 다른 범행에 사용될 수 있어 무장병력까지 배치했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범인을 잡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123일 만에 잡힌 용의자…강압 자백에 수사 다시 원점

경찰은 사건 발생 123일 만인 2003년 1월 20일 백 경사 피살 사건 용의자로 20대 남성 3명을 붙잡았다. 당시 경찰은 “중학교 동창인 이들이 2002년 5월22일 전주시내에서 무면허로 오토바이를 몰다 백 경사의 단속에 걸려 오토바이를 압수당하자, 이 오토바이를 찾으러 백 경사가 근무 중이던 파출소에 들어갔다가 시비가 붙어 흉기로 살해하고 권총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발표했다. 용의자들에게 범행 일체에 대한 자백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라진 권총과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찾지 못했다. 검거 2일 만에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용의자들은 각기 다른 진술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 용의자들을 접견한 변호사가 “구타를 당한 뒤 경찰관을 죽였다고 허위 진술을 했다”며 “경찰이 20시간가량 잠을 재우지 않고 허위 자백을 강요해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폭로했다. 결국 용의자들은 풀려났고, 시민단체 진정으로 조사를 벌인 국가인권위는 당시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후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대전 은행 강도범 제보로 21년 만에 발견된 권총

2001년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사건의 피의자인 이승만(왼쪽)과 이정학. /대전경철청

지난달 중순 전북경찰청에 ‘전주 경찰 살해 진범을 알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 편지를 보낸 건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 주범인 이승만(53)이었다. 이승만이 진범으로 지목한 인물은 대전 은행 강도살인 사건 공범인 이정학(52)이었다.

이승만이 보낸 편지엔 ‘사건 당시 현장에서 사라진 권총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실제 경찰이 지난 3일 이승만이 지목한 울산 모처에서 38구경 권총을 발견했다. 조사결과 이 권총은 백 경사가 사망 당시 소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승만이 이정학의 범죄를 경찰에 알린 배경과 관련해서는 이정학에 대한 배신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교 동창인 두 사람은 지난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 주차장에서 현금을 수송하던 은행 직원 김모(당시 45세)씨를 권총으로 쏴 살해하고 3억원을 들고 달아났다.

이 사건도 미제로 남았다가 사건 발생 21년 만인 지난해 8월 25일 이승만과 이정학이 붙잡히면서 해결됐다. 당시 먼저 붙잡힌 이정학은 “이승만이 주범”이라고 자백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재판과정에서 이정학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지난 1월 16일 대전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정학이는 사람이 간사하다고 해야 하나. 모든 죄를 저에게 덮어씌운 것 같다”며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내면 안 된다고 철저하게 약속했는데…”라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1심에서 이승만은 무기징역, 이정학은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백선기 경사 원한 이번엔 풀리나

대전경찰청 과학수사계 입구에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뉴스1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백선기 경사 피살 사건 수사는 이승만의 편지로 다시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수감 중인 이승만과 이정학 등에 대한 조사를 최근 진행했다. 이들이 어떤 진술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이정학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과 두 사람이 공모했을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경찰은 대전 은행 강도 사건과 백선기 경사 피살 사건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권총에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과 이정학은 대전 은행 강도 범행 2개월 전에 대전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차량으로 들이받아 권총을 빼앗았다.

백선기 경사가 살해된 시점은 대전 은행 강도 사건 이후지만, 경찰은 이 두 사람이 또 다른 범행을 위해 백 경사를 살해하고 총기를 탈취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실제 이승만은 “2003년 또 다른 현금 수송차를 털어 4억7000만원을 훔쳤다”고 추가 범행을 자백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권총이 어떻게 울산까지 갔는지 등에 대해 수사를 진행 중”이라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