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향 전 미국 국무부 통번역국장이 2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간담회를 열고 한국 특파원들에게 미국 외교 무대에서 ‘한국어의 입과 귀’ 역할을 하고 퇴임하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이라 문장이 길고 복잡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생각의 속도가 워낙 빨라 주제를 건너뛰는 일이 잦았죠.”

조지 W 부시부터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1·2기 행정부까지 16년 7개월 동안 미국 최상위 외교 무대에서 ‘한국어의 입과 귀’ 역할을 해온 이연향 전 미 국무부 통번역국장이 지난 2월 말 퇴임했다. 국무부 내에서 ‘닥터 리(Dr. Lee)’로 통했던 그는 26일 워싱턴 특파원단과의 간담회에 나선 자리에서 “백악관과 국무부 고위직들이 대거 참석한 성대한 은퇴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담긴 감사장까지 받으며 명예롭게 공직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이 전 국장이 국무부 정직원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이화여대 통역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09년이다. 그는 “어느 날 국무부에서 ‘한국어 외교 통역사 정직원 자리가 처음 만들어졌으니 지원해 달라’고 국제전화가 왔다”며 “‘한국어 통역의 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요청에 사명감으로 합류를 결정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수많은 고위급 인사의 통역을 전담했지만, 가장 진땀을 빼게 한 인물로는 오바마 전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꼽았다. 이 전 국장은 “오바마 전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이라 문장이 법률 문서와 같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여러 구와 절을 계속 붙여서 한 문장을 만든다”며 “필기를 하면서 그 긴 논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파악해야 해 기억력에 엄청난 부하가 걸렸다”고 회상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생각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 이야기 도중 제3자가 보기엔 약간 비약을 해 다른 주제로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머릿속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다”며 “통역할 땐 그 숨은 고리를 파악해 집어넣어 줘야 청중이 이해할 수 있어 머리를 정말 바쁘게 써야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8월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당시 미국 측 통역자로 나선 이연향(가운데) 미 국무부 통번역국장. / AFP 연합뉴스

통역사가 외교적 마찰의 희생양이 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2013년 당시 부통령이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방한해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지 마라(bet against the United States)’라는 강경한 표현을 썼을 때였다. 이 전 국장은 “나름대로 수위를 낮춰 최대한 부드럽게 통역했는데 발언이 논란이 됐고 한국 외교부 측에서 통역 잘못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며 “너무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것도 나의 역할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평양 출신이라 북한 사투리와 문화에 친숙하다는 그는 미·북 대화 통역에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 2018년 싱가포르부터 하노이, 판문점까지 세 차례 이어진 역사적인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 당시의 생생한 분위기도 전했다. 이 전 국장은 “당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두 정상 모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고 진정성 있고 솔직하게 대화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말이 많을 것 같지만 실제 발언 빈도는 비슷했고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이 많이 듣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에 대해서는 “세계 무대에 처음 나오는 것이라 긴장했을 텐데, 긴장을 풀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영어를 조금 알아듣는 것 같기는 한데 직접 쓰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 전 국장은 무관으로 주(駐)이란 대한민국 대사관에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중학생 시절 이란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주부로 지내다 친구의 권유로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한 늦깎이였다. 퇴임 후 워싱턴 DC에 남아 새로운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