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만난 한석주 전 연세대 전 소아외과 교수/ 고운호 기자

의사 경력 대부분을 세브란스 어린이 병원 소아외과에서 보낸 한석주 전 교수는 2012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신설된 장기재원환자관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취임했다. 새로운 보직을 맡자마자 그의 눈에 띈 환자는 2007년부터 12개 이상의 진단명으로 하루 200만원짜리 특실 병실에서 입퇴원을 반복한 윤모 씨였다. 윤씨는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의 주범인 ‘제분 회사 사모님’. 무기징역이 확정돼 교도소에서 복역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나이롱’ 환자로 5년간 병원에서 호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윤씨의 입원 기록과 외출 기록을 정리해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전했다. 이 일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윤씨는 감옥으로 돌아갔고, 사건에 관련된 윤씨의 남편과 다른 교수는 구속됐다. 평생 몸담은 병원과 동료를 고발하는 데 한 교수는 망설임이 없었을까.

“그때 딸을 잃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났지,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이 무너지면 이 사회가 어떻게 제대로 지탱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저를 두고 아내는 오지랖이 넓다고 핀잔을 주긴 하죠.”

한 교수는 지난해 교수 정년퇴직 후 서울 서초동으로 출근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 상임전문심리위원으로서, 법정에서 의료 소송 자료를 검증하고 감정서를 작성한다. 지난 6일 법원에서 만난 그는 “어릴 때부터 따지기를 좋아해서 나를 보고 아버지는 검사를 하라고 했다”며 “의사 시절에도 수사 기록 보는 걸 좋아해서 법조계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상임전문심리위원 공석이 나길 기다렸고, 모집 공고가 났을 때 부리나케 지원했다. 한 교수는 “의사 시절에도 검찰이나 법원에서 의료 사고나 아동학대 사건 의뢰가 오면 전문 감정을 했다. 돈이 안 되고, 시간도 뺏기는 데다가 안 한다고 벌받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의사의 의무다.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한 데엔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나영이’(가명)의 수술을 담당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당시 나영이는 다른 병원에서 평생 배변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뒤 한 교수가 일하던 세브란스 어린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친구와 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나영이 소식이 흘러나왔을 때 ‘(배변주머니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다’고 한마디 했다. ‘방법이 있는데 넌 뭘 하고 있느냐’는 친구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나영이 담당 의사가 아니었지만 다음 날 바로 만나러 갔고, 장기 복원 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을 앞두고선 조두순 사건의 수사기록을 샅샅이 연구했다. 한 교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손이 덜덜 떨리고 약간의 공황 상태가 됐지만, 그 기록 덕분에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다”며 “ ‘넌 뭐 하냐’는 친구의 한마디가 마음에 남아서 그 뒤로도 나를 움직이는 기폭제가 됐다”고 했다.

각종 사건·사고로 이름을 알린 한 교수는 담도폐쇄증 환자 사이에서 ‘명의(名醫)’로 통한다. 정년퇴직을 기념하며 최근 출간한 책 ‘내 생애 최고의 수술’(다빈치 북스)은 그가 담도폐쇄 수술을 한 환아의 어머니인 변문경 작가가 기획했다. 변 씨는 “아이의 목숨을 살려준 하 교수의 수술이 내 생애 최고의 수술이었다”고 했다. 하 교수에게 ‘최고의 수술’은 뭘까. “가장 어렵거나, 결과가 유달리 좋다고 해서 최고의 수술은 아닙니다. 남들은 성공했다고 축하했던 ‘융합쌍둥이(샴쌍둥이)’ 수술이 저에겐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는 수술이었거든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는 수술이라면 다 최고의 수술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