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들은 걸 기록하지 않았다면, 척박한 현장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동포들의 얼굴은 진즉 잊혔을 겁니다.”
라종억(79)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지난달 22일 본지 인터뷰에서 “소외된 해외 동포들을 한 울타리로 엮고 지원하는 건 통일 기반 조성에 필수 사업”이라며 “(내 인생은) 우리 민족의 흩어진 파편을 모으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제헌의원을 지낸 백봉(白峰) 라용균(1896~1984) 선생의 아들인 라 이사장은 1998년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한 뒤 탈북민과 고려인·다문화인에 대한 교육과 의료 지원, 사회 통합 활동을 해왔다. 최근 그는 2001년부터 2024년까지 23년간 세계 곳곳을 방문한 기록을 담은 9권의 현장 답사기를 출간했다.
20여 년 동안 라 이사장의 발길은 화려한 도시보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와 오지를 향했다. 그가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부친의 활동 덕분이다. 아버지 라용균 선생은 청년 시절 상하이와 시베리아를 누비며 독립운동을 펼치다 투옥됐다. 라 이사장은 “아버지가 고초를 겪으셨던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그 땅에 남겨진 고려인들이 보였다”며 “고려인은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를 쓰지만 분명한 조선인의 후손”이라고 했다.
9권의 현장 답사기 중 ‘중앙아시아를 품다’에서 그는 지난 2017년부터 2023년까지 7년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간 경험을 생생하게 풀어놓는다. 라 이사장은 “현장을 다니다 보니 고려인 동포를 돕는 일이나 그들을 받아준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국민을 돕는 일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고려인 정착에 도움을 준 카자흐스탄 국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현대병원(원장 김부섭)과 2018년부터 현지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2019년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고려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고 2020~2021년 한국·카자흐스탄 우호 공원을 조성했다.
통일문화연구원은 2014년부터는 본지와 함께 ‘통일과나눔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탈북민과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과 함께 한국 정착을 위한 직업 교육을 하고 있다. 2017년부터는 국내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진행하던 통일나눔아카데미 중앙아시아 지부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설립해 고려인에게 한글 교육 지원을 시작했다. 라 이사장은 책에서 “2018년 알마티 고려극장을 방문했을 때, 통일나눔아카데미의 추천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고려인 학생이 다른 고려인·카자흐스탄인 친구 10여 명과 함께 북을 연주하며 나를 맞아줘 보람찼다”고 했다.
라 이사장은 ‘아시아의 색채’에서는 지난 2002년 라이따이한(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을 지원하는 베트남 호찌민시의 ‘휴메인 직업훈련학교’를 방문한 경험을 소개했다. 이곳에서 만난 베트남 한인 2세들은 국내 대학에서 기술 연수생으로 교육받은 뒤 베트남으로 돌아가 다른 라이따이한을 가르치면서 현지 산업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는 “현지를 찾아보니 두 나라는 베트남 참전이라는 대립의 역사를 넘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고 했다.
라 이사장은 “단순한 한글 교육을 넘어 고려인과 탈북 청소년들이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교육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라며 “망국(亡國)의 한이 서린 중앙아시아에 고려인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어 우리 국민과 고려인, 탈북 청소년, 다문화 청소년에게 올바른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