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수퍼미들급 4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오른 테런스 크로퍼드가 챔피언 벨트 여러 개를 뽐내고 있다./AFP 연합뉴스

지난 9월 13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얼리전트 스타디움에 7만여 관중이 들어찬 가운데 복싱 빅매치가 펼쳐졌다. 복싱 4대 기구(WBC·WBA·IBF·WBO) 수퍼미들급(76.2㎏) 통합 챔피언 카넬로 알바레스(35·멕시코)의 아성에 수퍼웰터급(69.85㎏) 챔피언 테런스 크로퍼드(38·미국)가 두 체급을 올려 도전한 것이다. 결과는 크로퍼드의 3대0 전원일치 판정승. 그는 알바레스의 챔피언 벨트를 모두 가져오며 새로운 수퍼미들급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 경기는 넷플릭스를 통해 약 4100만명의 복싱 팬들이 지켜봤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지 약 80일이 흐른 지난 3일, 4대 기구 중 하나인 WBC(세계복싱평의회)가 크로퍼드의 챔피언 자격을 박탈했다. 이유는 그가 ‘타이틀 승인료(sanctioning fee)’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승인료는 챔피언 타이틀전을 치르는 복서가 주관 기구에 내는 일종의 수수료로, 보통 대전료와 상업 수익 등을 합한 총수익의 3%를 납부한다. 이 비용은 기구 운영비나 복서 복지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되기도 한다. 크로퍼드나 알바레스처럼 세계 정상급 복서들은 수익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3%를 다 내기보다 주관 기구와 협의를 통해 적정 수준의 금액을 부담하는 것이 관례다.

WBC는 크로퍼드에게 그가 이번 대결로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진 5000만달러(약 735억원)의 0.6%인 30만달러(약 4억 4000만원)를 타이틀 승인료로 요구했다. 그러나 크로퍼드는 이 금액을 석 달 가까이 내지 않았고 WBC의 연락에도 응답을 하지 않아 챔피언 자격을 박탈했다는 게 WBC 측 설명이다.

크로퍼드가 돈이 없어서 승인료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를 두고 수퍼스타와 복싱 기구 간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크로퍼드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라이브 방송을 통해 “다른 세 기구는 내가 제시한 금액을 그대로 받았다. WBC는 뭐가 더 잘났다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가”라며 “그딴 챔피언 벨트는 필요 없다”며 욕설까지 섞어 강하게 비난했다.

정상급 복서와 경기 주관 기구가 타이틀 승인료를 두고 기싸움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무패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48)는 2015년 매니 파키아오를 꺾고 WBO(세계복싱기구) 웰터급 챔피언에 올랐지만, WBO가 요구한 타이틀 승인료 20만달러(약 2억9000만원)를 내지 않았다. WBO는 승인료 미지급과 더불어 메이웨더가 WBC와 WBA에서 여러 체급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해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벨트를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