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엄홍길(왼쪽) 집행위원장이 9년 전 영화제를 찾은 라인홀트 메스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개로 만든 액자를 선물하고 있다. /정병선 기자

“산은 영원한 스승입니다.”(엄홍길)

“히말라야에서 살아남은 것은 운입니다.”(메스너)

28일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에서 만난 영화제 집행위원장 엄홍길(65)과 ‘산악계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81·이탈리아)는 산과 영화를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이번 만남은 산이 아닌 영화제에서, 집행위원장(엄홍길)과 울산울주세계산악문화상 수상자(메스너)라는 특별한 인연으로 성사돼 영화제 최대 화제를 모았다. 영화제에서 메스너가 등장하는 자리마다 사인을 받으려는 긴 줄이 이어졌고, 그가 직접 감독한 다큐멘터리 ‘스틸 얼라이브’는 일찌감치 매진됐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메스너는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철학을 전했다. 대담이 끝난 뒤에는 박수가 이어졌고, 젊은 세대 산악인들이 질문을 쏟아내는 등 현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메스너는 1978년 세계 최초로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고, 1986년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을 달성했다. 그는 ‘어떻게 오르는가’라는 ‘등반 스타일’을 무엇보다 중시한 인물로, 근대 등산사에 새로운 윤리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엄홍길은 198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2007년 로체샤르까지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을 마치며 한국 산악계를 세계적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날 대화에서 두 거인이 들려준 철학의 결은 달랐지만, 산을 대하는 태도는 같은 지점에서 만났다. 메스너가 “히말라야에서 살아남은 것은 운이었다”고 했듯, 엄홍길도 “히말라야 신의 보살핌 덕분”이라며 동의했다.

두 산악인은 히말라야 14좌 등정 이후 등정이라는 수직 인생보다 나눔과 봉사라는 철학을 통한 수평 인생을 살아왔다. 둘은 각각 12명(메스너), 10명(엄홍길)의 동료를 히말라야에서 잃었다. 살아남은 죄책감은 결국 봉사와 나눔으로 이어졌다. 메스너는 1999년 ‘메스너 재단’을 세워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병원을 지었고, 엄홍길은 2007년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해 네팔 아이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제공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지금 더욱 절실하다. 상업 원정이 보편화하고, 인공 산소 남용과 쓰레기, 기후 위기 문제가 산악계를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두 사람이 산에서 배운 철학은 결국 “남은 인생을 나눔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모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