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韓紙)는 ‘우리 종이’지만, 원재료인 닥나무를 중국·태국·베트남 등 외국에서 대부분 수입한다.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의 85%가 외국산이다. 값이 국내산보다 5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전체 종이 시장도 쇠퇴하고 있지만 우리 한지는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은 전통 한지 부흥을 이끄는 숨은 주인공이다. 10일 대전 서구 신협중앙회 본사를 찾았을 때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한지에 붓으로 직접 쓴 ‘自强不息(자강불식·스스로 단련을 쉬지 않는다)’ ‘登高自卑(등고자비·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같은 서예 작품을 써서 벽에 걸고 있었다. 그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지를 기본부터 다시 시작해 부흥시키려는 의지이자 신념을 적은 것”이라고 했다.
시작은 6년 전이었다. 2019년부터 전주시 및 전북지방환경청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지난해 4월 전북 익산시 왕궁면의 옛 축사단지 1200평에 닥나무 3000그루를 심었다. 앞으로 3년 동안 3만평 땅을 더 확보해 9만 그루를 심을 계획이다. 김 회장은 “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한지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며 “국산 수급률이 15%에 그치고 있는 닥나무 원료를 100%로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오는 27일 전북대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전주 한지 민·관 협력 성과 공유회’를 연다. 이번 행사에서 한지 판로 개척, 한지 후계자 양성, 원재료 닥나무 심기 등 전주 한지를 살리기 위해 그동안 해온 사업의 성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전주 한지마을을 지키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한지를 만드는 전문 기술인은 고령화하는 추세. 한지 기술을 배우는 젊은 인재 발굴과 계승이 절실하다. 김 회장은 전주시와 협력해 국내 1호 전주 한지장 후계자 나민수씨를 찾았다. 전주 한지마을을 관광 명소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전통문화 사업을 일으킬 계획도 마련하고 있다. 김 회장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처럼 전주 한지마을을 한국 하면 떠오르는 ‘문화 메카’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주 한지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왕실에 올리던 진상품이자, 각종 외교 문서에 활용된 우수한 역사를 가진 종이다. 미루나무나 대나무로 만드는 일본의 화지(和紙)와 중국의 선지(宣紙)보다 뛰어난 내구성과 보존성을 자랑한다. 문화유산 복원에도 사용되면서 세계에서 경쟁력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고종 황제와 바티칸 교황 간 친서 복본을 만드는 데 사용됐고, 루브르 박물관 문화유산 복원에도 활용되고 있다.
김 회장은 40여 년간 서예를 하면서 한지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 1997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서예 부문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5살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서예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면서 “나에게 붓과 한지는 취미 생활을 넘어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동안 한지 관련 여러 일을 했다. 2019년 전주한지협동조합을 설립해 한지 제품의 R&D(연구·개발)를 지원하고 판로 개척에 힘썼다. 지난 코로나 시기에는 KF94 전주한지 방역 마스크 250만장을 제작해 판매했다. 친환경 전주한지 침구 세트, 한지 비누, 한지 물티슈 같은 생활용품도 만들었다. 지난해까지 누적 매출액은 33억원. 김 회장은 “한지는 이제 부흥 단계에 접어들었고 앞으로는 발전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며 “20~30년 후에는 전주 한지가 세계적인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주 한지를 세계로 수출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