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영아의 아들’로 살지 않고, 엄마가 ‘김원호의 엄마’로 살 수 있게 더 뛰어야죠. 목표는 엄마를 넘는 겁니다.”
아들이 배드민턴 채를 잡았던 18년 전, 어머니와 아들은 올림픽 같은 종목에서 시상대 위에 설 것을 예상했을까. 2024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 복식에서 정나은(23·화순군청)과 짝을 이뤄 은메달을 따낸 김원호(25·삼성생명)는 길영아(54) 삼성생명 배드민턴단 감독 아들. 한국 올림픽 역사에 첫 모자(母子) 메달리스트로 이름을 남겼다. 길영아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혼합 복식)·은메달(여자 복식),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동메달(여자 복식)을 따낸 한국 배드민턴계 전설이다.
15일 만난 길영아-김원호 모자는 여느 엄마와 아들에 비해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꼭 닮은 외모에 웃는 모습마저 비슷했다. 엄마를 뛰어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는 김원호를 바라보는 길영아 눈에는 그는 그저 아직 어린 아들이다. 길 감독은 “이미 ‘김원호의 엄마’로 살고 있다. 원호가 다치지 않고 아프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원호는 지난 아시안게임까지만 해도 남자 복식이 주 종목이었다. 네트 플레이에 강한 김원호는 동료보다 앞에서 상대 공격을 끊어내는 수비에 강점이 있다. 뒤에서 스매시를 팡팡 때려내는 동료와 함께 나서는 남자 복식에 비해 남자 선수가 더 강력한 공격을 뽐내야 하는 혼합 복식과는 잘 맞지 않았다.
지난해 아시안 게임에서 아쉽게 은메달을 땄던 김원호는 이번 파리 대회 남자 복식 금메달을 꿈꿨다. 그런데 함께 호흡했던 최솔규가 음주 등 불미스러운 일로 대표팀 자격을 잃었다. 허망했다.
“한발 나가려고 하면 넘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조금 일이 풀리려고 하면 망가지고, 깨지고…. 올림픽 메달을 원할수록 멀어지더라고요.”
그는 “아시안게임 결승 이후 내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아예 출전조차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그래도 남아있는 거에 할 수 있는 노력이 있으니 거기에 집중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제 남은 건 혼합 복식. 이번 올림픽에서 김원호-정나은 조가 메달을 딸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김원호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는 10월 국군체육부대 입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길 감독도 ‘출전에 의미를 두는 거지...’라고 봤다. 길 감독은 “파리에 와서 조가 발표됐는데, 인도네시아-프랑스-중국과 함께 편성된 ‘죽음의 조’였다. 아들의 도전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원호-정나은 조는 조 예선 1차전에서 인도네시아에 1대2로 졌다. 김원호는 “첫 경기가 승부처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실수도 많았다. 한 끗 차로 아쉽게 지면서 ‘끝났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길 수 있고 이겨야만 하는 첫 경기에서 진 김원호는 길 감독에게 전화 걸어 “엄마 미안해”라고 말했다. 길 감독은 “네가 더 속상할 텐데 엄마한테 왜 미안하냐”고 답했다. 길 감독은 “사실 저도 낙담했다. 중국에 지더라도 나머지는 다 이겨야 했는데 아쉽더라. 그래서 ‘다음은 있다. 걱정하지 마라. 마음껏 해라’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치러진 프랑스전. 김원호-정나은조가 2대0으로 깔끔하게 승리를 가져갔다. 김원호는 “그 경기도 지면 후회가 남을 거 같았다. 빈손으로 갈 순 없었다. 기대에 못 미치니 미안한 마음, 허탈한 기분도 들었지만 뭔가 좀 더 해볼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프랑스에 이겼더라도 중국에 진 김원호-정나은조는 8강 진출권인 조 2위는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프랑스조가 인도네시아를 잡아줬다. 결국 중국(세계 1위 정쓰웨이-황야총 조)을 제외한 세 팀이 1승 2패로 동률. 김원호-정나은이 게임 득실차에서 근소하게 앞서 극적으로 8강행 티켓을 잡았다.
그렇게 8강에서 홍콩을 꺾고 성사된 4강전. 상대는 금메달을 노리는 세계 2위 서승재(27·삼성생명)-채유정(29·인천국제공항). 대표팀 선배였다. 이전까지 상대 전적은 0승 5패. 이날 김원호는 구토까지 하면서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김원호는 “그렇게 토할 정도로 경기한 적은 없었다. 시합 중간에 단백질 보충제를 먹고 뛰었는데 그게 바로 올라왔던 거 같다”고 했다. 관중석에서 조용히 아들을 응원하던 길 감독은 “아들 얼굴 보니 곧 토할 거 같아 관중석에서 ‘토하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못 들은 거 같았다. 나는 한 번도 경기 중에 그런 적은 없었다. 원호가 긴장되다 보니까 밥도 못 먹었다고 하더라. 토하고 나서 스매시까지 때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고 했다.
1시간 12분 혈투 끝에 승리를 따낸 김원호는 “사실 다 어려웠지만, 제일 어려웠던 경기가 4강전이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연습도 같이 하면서 서로 어떤 걸 잘하고 못하고 다 알기 때문에 쉽지 않았는데, 심지어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팀이었다”고 했다. 4강전에 온 힘을 쏟아부은 탓이었을까. 결승에서 다시 만난 중국 정쓰웨이-황야총 조에겐 2대0으로 완패했다.
김원호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잘하든 못하든 “길영아 아들이래”라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김원호가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면 좋겠어”라고 말하자 길영아는 “배드민턴계에서 엄마는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다. 스스로 ‘길영아 아들’로 살지 말고, 엄마를 ‘김원호 엄마’로 살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메달을 딴 순간 그는 그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니까 메달을 따고 말한 “‘김원호의 엄마’로 살게 하겠다”는 김원호 말은 사실 길영아가 한 말이었다. 길 감독은 “원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했던 말인데 이 말을 여태껏 품고 살았는 줄 몰랐다. 인터뷰 때 그렇게 말하길래 놀랐다”고 했다.
김원호 다음 목표는 남자 복식 금메달이다. “여자 복식에서 메달을 딴 엄마처럼 남자 복식에서 성과를 내고 싶어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기까지 이렇게나 힘든 게 많았는데, 엄마는 어떻게 이겨냈는지 생각할수록 더 대단하고 놀라운 것 같습니다. 앞으로 목표는 LA에서 금메달을 따고 정말로 엄마를 뛰어넘는 겁니다.”
☞길영아·김원호
길영아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복식 동메달,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 복식 금메달, 여자 복식 은메달리스트다. 삼성전기(현 삼성생명) 배드민턴단 트레이너부터 시작해 코치까지 맡았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감독을 맡고 있다. 아들 김원호는 수원 매원고를 나와 삼성생명에 입단했고, 파리 올림픽에서 배드민턴 혼합 복식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첫 모자(母子) 메달리스트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