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야구사(史)에 빼놓을 수 없는 부자(父子)가 있다면 그리피 부자다. 켄 그리피 시니어(74)는 1973년부터 1991년까지 MLB(미 프로야구) 무대를 누비며 올스타에 3회(1976, 1977, 1980년) 선정됐고, 월드시리즈에서 두 차례(1975, 1976년) 정상을 밟았다.
그의 아들 켄 그리피 주니어(55)는 1989년부터 22시즌을 뛰고 지난 2010년 은퇴했다. MLB 역대 7위에 해당하는 630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홈런왕만 네 번 차지했고, 정규 시즌 MVP(최우수선수) 1회, 골드글러브 10회, 실버슬러거 7회, 올스타 13회 등 화려한 수상 기록을 남겼다. 지난 2016년 기자단 투표에서 총 440표 중 437표(99.3%)를 얻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리는 MLB 2024시즌 정규 리그 개막 2연전 ‘서울 시리즈’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리피 주니어는 21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취재진과 만나 “한국이 야구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며 “짧게 머무르다 가지만, 경기장을 둘러보며 열기가 정말 남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의 개막 2차전을 앞두고 마운드 앞에 서 한국 유소년 야구 선수 두 명의 시구를 지도했다. 전날 1차전에선 다저스가 5대2로 승리했다.
그리피 주니어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관광을 참 많이 했다”고 웃으며 “남산 타워가 가장 기억에 남고, 어제는 궁을 다녀왔다.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고 전했다.
특유의 역동적인 타격 포즈로 MLB를 평정한 전설적인 야구 선수였지만, 사실 그리피 주니어의 현 직업은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그는 지난 NFL(미 프로풋볼) 시즌 경기에도 나서 주요 장면을 담았고, 작년 월드시리즈 다섯 번째 게임도 챙겼다.
대형 카메라를 든 채 방한(訪韓)한 그는 “(2010년 은퇴하기 전인) 2009년에 사진 일에 발을 담갔다”며 “세 아이들이 자라나는 순간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시작했다. 첫째 아들의 대학 첫 (미식축구) 터치다운, 딸의 대학 첫 (농구) 득점 등을 사진으로 찍었다”면서 흐뭇해 했다. 그는 “전문 사진작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며 “수십만 장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한두 장을 고르기가 가장 어렵다”고 웃어넘겼다.
그래도 그는 야구를 잊지 못한다. 여전히 야구 경기장에서 현역 선수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조언을 건넨다. 그리피 주니어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야구를 한 건) 내가 야구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며 “은퇴를 할 때 가장 힘들었다. 그 다음 계획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은퇴하고 1년 반가량은 집에서 빈둥빈둥 있기만 했다”고 돌아봤다.
그리피 주니어는 부자(父子) 선수로서 ‘바람의 아들’ 이종범(54)을 아버지로 둔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대해서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 않았냐는 질문엔 “아버지 덕분에 내가 이름을 알리는 건 어렵진 않았다”면서도 “그래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거울을 바라봤을 땐 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정후가) 빅리그에 입성했다는 건 이미 뛰어난 선수라는 게 증명됐다는 것”이라며 “평소대로 하면 된다(Just be yourself)”라고 조언했다.
향후 감독 자리에 대한 생각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엔 “아내는 내가 감독을 하기엔 너무 역량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라고 너스레를 떨며 “그래도 항상 야구를 위한 일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