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요? 앞으로 5년은 더 탈 것 같은데요.”
2024년 새해 첫날 모나 용평 스키장. 중상급자가 타는 레인보 파라다이스 코스에서 만난 이근호(98) 설해재단 이사장은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설원을 가르며 슬로프를 내려오는 모습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이 이사장은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찬 바람의 느낌은 최고”라며 “지금 당장 젊은이는 물론 60세 이상 퇴직자들에게도 스키를 권하고 싶다”고 했다. 1926년생인 이 이사장은 7일 98세 생일을 맞았다.
이 이사장의 스키 인연은 대구 계성고 동기 김재현 전 쌍용그룹 부회장(2013년 작고)이 1983년 제12대 대한스키협회 회장을 맡은 뒤 그에게 협회 부회장(1983~1987년)을 권유하면서다. 미국 새너제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는데 스키협회의 외국어 구사 인력이 없어 국제 업무를 볼 사람이 마땅치 않자 이 이사장을 영입한 것이다. 이 이사장은 “스키를 타본 적도 없었는데 덜컥 스키판에 발을 디딘 배경이다”고 했다. 그는 이듬해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대비 대표팀 단장을 맡아 프랑스 그르노블 전지훈련장에서 스키를 처음 신었다. 나이 60세였다.
“선수들이 전부 훈련을 나가면 스키를 못 타 혼자 외톨이가 됐지요. 바로 현지 스키 학교에 등록해 스키를 배웠지요.” 계성중 재학 시절 유도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유도, 농구, 축구, 탁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협회 직원으로 스키를 못 탄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내 스키에 빠져들었다. 그는 외국 스키 교본을 번역하며 전문가 수준이 됐다. 일본에서 1급 스키 지도자 자격증까지 땄다. 해마다 스키 시즌이면 용평 스키장을 찾아 살다시피 했다. 국내 시즌이 끝나면 남반구 뉴질랜드로 날아가 스키를 탔다. 77세에 건강 문제로 폐 한쪽을 떼어냈고. 90세에는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 이사장은 장수의 비결을 묻자 “스키를 타며 하체를 단련한 덕이다”라고 했다. 이 이사장의 허벅지는 60대 수준. 그는 “요즘도 스키를 5시간 전후로 타고, 비시즌에는 2시간 이상 사이클링 머신을 타면서 하체를 단련한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매년 2월 미국에서 90세 이상 실버 스키어들이 모이는 클럽 대회에서 우승한 뒤 최장수 스키어로 남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 94세 스키어가 있지만 내 나이는 없다”며 “지금 상태라면 5년 정도는 더 탈 것 같다”고 엄지 척을 했다.
해운업에 종사하던 이 이사장은 사업을 접고 2003년 자신의 호(설해·雪海)를 딴 장학재단을 설립해 스키 선수들을 지원하고 있다. 국내 스키 유망주와 각종 국제대회 메달리스트에게 매년 5000만원의 격려금을 전달하는데 이미 10억원을 넘겼다.
신달순 용평 스키장 대표는 “이 이사장을 위해 시즌권은 물론 스키 타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배려를 하고 있다”며 “이근호 이사장의 스키 타는 현역 최장수 할아버지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용평=정병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