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유언이 있었습니다. 언니, 동생과 논의했고 약속대로 1억원을 기부하겠습니다.”
지난 15일 대구 계성고 행정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의 여성은 자신을 ‘3년 전 기부자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3년 전 기부자는 1956년 계성고를 졸업한 고(故) 노중형씨. 노씨는 당시 “제가 과거 잘못 받았던 장학금을 돌려드리겠다”며 300만원을 학교에 가져왔다. 그때 “나중에 사정이 되면 1억원을 더 기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지난 6월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노씨의 생전(生前) 약속은 지난 15일 그의 딸들에 의해 지켜졌다.
노씨는 1953년 6·25전쟁 때 대구로 피란 왔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는 당시 대구 계성학교(계성고 전신)에 재입학했다. 가난으로 학비를 내기가 어려웠던 그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션 스쿨인 계성학교에는 당시 목사의 자녀에게 주는 장학금이 있었는데, 담임교사가 학적부에 적힌 노씨 아버지 직업란의 ‘군속(軍屬·군무원)’이라는 글자를 ‘군목(軍牧·군종목사)’으로 착각해 장학생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고교 시절 이런 일이 연거푸 두 번이나 일어나 노씨는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서울대를 나와 교편을 잡았고, 평생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어릴 적 받았던 장학금의 부담을 마음속에 지고 살았다고 한다. 교직에서 은퇴한 노씨는 지난 2020년 자신이 받았던 장학금을 당시 가치로 환산해 300만원을 모교에 보냈다. 그러면서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어서 (당시는) 솔직히 말하지 못했었다”며 “그 빚으로 앞으로는 어려운 후배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익명으로 기부했던 당시 그는 본지에 “조용히 진행하려는 뜻과 맞지 않아 (인터뷰는) 정중히 거절한다”며 “10년쯤 뒤 90대 중반쯤 되면 1억원을 더 기부할 생각”이라고 했었다.
지난 6월 노씨가 별세한 뒤 딸 셋은 이견 없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로 했다. 계성고 관계자는 “자녀분들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좋은 곳에만 써 달라’고 했다. 당부는 그뿐이었다”고 전했다.
계성고는 내부 논의 끝에 기부자 이름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박현동 교장은 “어려운 시기를 딛고 교육자로 헌신했던 고인은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자 했다”며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위해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