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7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하는 흑백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타계 반 년 전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연주를 보여준다. 감독을 맡은 아들 네오 소라는 본지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존엄과 한계를 모두 담았다”고 했다. /엣나인필름

“한 번 더 납득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싶다. 맡아달라.” 지난 3월 암으로 작고한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는 죽음을 반 년 앞둔 작년 9월 한 영화 감독에게 자신의 마지막 연주를 찍어달라고 했다. 부탁을 받은 감독은 조건을 걸었다. “평소에 즉흥적으로 연주곡을 정하는 경우가 많으셨는데, 이번엔 레퍼토리를 빨리 정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사카모토는 지난 6월 출간된 마지막 저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감독이 상당히 엄격한 분이라 꽤 이른 단계부터 레퍼토리를 정해야 했다’며 당시 긴장했던 상황을 술회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를 긴장하게 한 감독은 소라 네오(空音央). 사카모토의 아들이다. 두 사람이 부자(父子) 관계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소라 감독은 부친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개봉을 앞두고 본지 서면 인터뷰에서 “저와 아버지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화로 관심이 모였으면 좋겠다”며 가족 관계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오퍼스’의 제작 총괄은 사카모토의 매니저이자 아내인 소라 노리카(空里香). 거장은 세상에 남기는 작별 인사를 아내와 아들에게 맡겼다.

소라 감독은 인터뷰에서 “아버지 부탁을 받았을 때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며 “그분의 마지막 존엄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예술가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아들에게 전에 몰랐던 면모를 보여줬다. 소라 감독은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그분이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생겨난 모순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곡가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답했다.

촬영은 작년 9월 8일부터 8일간 진행됐다. 클래식, 얼터너티브, 전자음악을 넘나들며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사카모토가 자신의 50년 음악 인생을 보여주는 20곡을 직접 선곡했다. 영화음악 데뷔작인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마지막 황제’(1987), 지난달 개봉한 영화 ‘괴물’에 흐르는 ‘아쿠아’ 등이 이어진다. 소라 감독은 “각 곡을 1~3번 촬영해 완성했는데, 좋은 연주는 일회성이기 때문에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가 돌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영화는 흑백이다. 색(色)이 지워진 자리에 피아노와 하나로 이어진 사카모토와 음악만 남았다. 사카모토는 조명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거나 어둠에 잠기며 떨리는 손으로 작별을 연주한다. 소라 감독은 “시각 정보를 줄여 음악과 소리에 보다 더 집중하게 했다”며 “피아노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몸이라는 신체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했다.

류이치 사카모토 아들 네오 소라

아들은 아버지의 한계까지 그대로 기록했다. 한 부분에서 사카모토가 힘이 부친 듯 가쁜 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는 장면이 있다.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주저하기도 한다. “잠시 쉬고 합시다, 좀 힘드네”라는 말도 한다. 그가 20대에 전자음악 밴드인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만든 ‘동풍’(東風, 1978) 연주는 원곡보다 박자가 다소 느리다. 소라 감독은 “과거에는 빠른 템포로 연주했지만, 당시 몸 상태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건반 터치가 잘못된 부분이 꽤나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며 “관객에게 그분의 한계까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오는 27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다. 소라 감독은 “아버지께서 한국 사람, 문화, 역사를 매우 좋아하셨고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한국 분들께 보여드리는 것을 매우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사카모토는 타계 직전까지 병실 침대 정면에 한국 단색화 대가 이우환 화백의 그림을 걸어 놓는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사카모토는 촬영이 끝난 후 “하루에 몇 곡씩 집중해서 연주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며 “죽기 전에 만족할 만한 공연을 녹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아들에 대한 사랑을 담은 한 마디도 잊지 않았다. “좋은 작품이 되었다. 자랑스럽다.”

영화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끝난다. 사카모토가 세상이라는 무대를 떠나는 소리다. 이어 그를 위한 조종(弔鐘)인 듯 풍경(風磬) 소리가 뒤따른다. 소라 감독은 “영화를 보다 졸리면 주무셔도 된다”며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함께한다는 느낌으로 지켜봐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