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느리게 나이 들게 하고 싶어요. 진심입니다.”
가속 노화가 아니라 감속 노화의 세상을 꿈꾼다.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39) 교수의 목표다. 내과·외과·안과·이비인후과처럼 신체 부위를 과(科)의 이름으로 한 대부분의 병원 진료와 달리, 환자 연령대로 나눈 진료가 있다. 어린이 대상의 소아과처럼, 어르신을 치료하는 노년내과가 그 드문 사례다. 하지만 노년내과가 노인들만 대상이라는 것은 편견. 그 자신도 젊은 정 교수가 말했다. “젊은이가 빠르게 늙는 것을 막고, 어르신이 느리게 늙도록 돕고 싶습니다.”
정 교수는 “당신들은 부모보다 빨리 늙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는 경고로 3040세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숫자 나이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많은 것이 ‘가속 노화’. 그는 현대인 대부분이 ‘가속 노화’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나이는 젊지만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노쇠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건강한 식사나 신체 활동, 회복 수면, 절주, 머리 비우기 등을 통해 우리 몸의 전반적인 노화 속도를 낮추라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일견 당연한 듯하지만 의학적 실험 결과와 통계 숫자로 경고와 대안을 제시하자, 사람들은 세대 불문 호응했다. 소셜미디어 X(트위터)에서 그가 3만 팔로어의 스타 의사가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tvN의 ‘유퀴즈’ 등 방송과 유튜브 출연은 물론 본지에도 ‘늙기의 기술’을 연재하며 전방위 활약을 펼치는 중. 최근에는 신간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한빛라이프 刊)을 펴내고 느린 노화와 건강한 노년을 위한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 교수가 강조하는 가속 노화와 감속 노화 개념은 ‘개인’을 중심에 둔다. 그는 “몸에 있는 노화 시계는 사람마다 다르게 흘러간다”고 설명했다. 같은 1초라도 누군가의 노화 시계는 2초씩 빠르게(가속 노화), 혹은 0.5초씩 느리게 흘러갈 수도 있다(감속 노화)는 뜻이다. 그는 “가속 노화가 쌓이면 마흔 살에도 60세의 몸을 가질 수 있다. 먹고, 움직이고, 마시고, 즐기고, 쉬는 것들이 노화 속도를 결정하는 인자들”이라면서 “각자 다르게 흘러가는 시계를 감속시키려면 맞춤 매뉴얼을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가속 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스스로의 스트레스에서도 비롯됐다. 경기 부천시에서 당시 직장이었던 분당 서울대병원까지 왕복 5시간을 출퇴근에 소비하며 ‘가속 노화’를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장시간 통근과 과로 때문에 잠이 부족했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술과 가공 음식에 의존했다”면서 “결국 인지 기능이 떨어져 낮에 글을 제대로 못 읽는 등 가속 노화의 악순환이 생겼다”고 했다.
이후 자신만의 ‘느리게 나이 드는 법’을 실천했다. 13개월 동안 술을 끊고 올리브 오일과 렌틸콩 등 통곡물 위주의 식사를 했다. 달리기 운동도 다시 시작하며 일주일에 거의 30㎞ 이상을 뛸 만큼 체력을 길렀다. 집중력을 높여 일하는 시간을 줄였고, 잠자는 시간은 의도적으로 늘렸다. 정 교수는 “노화를 빠르게 만드는 여러 밸브에 누수가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에게 맞는 처방을 내렸다”며 “가속 노화의 악순환이 끊어지면서 회복탄력성이 개선되는 경험을 했다”고 했다.
그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병원에서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어쩌면 다른 분야, 소위 인기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국 환경에서는 낯설었던 노년내과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정 교수는 2008년 본과 3학년 첫 내과 실습에서 노년내과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전에는 환자 진단 후 ‘약을 처방하는 것’만 배웠는데, ‘약을 빼는 것’으로 환자의 상태를 좋아지게 만드는 선배의 마법을 목격한 다음이었다. 그는 “몸 구석구석이 아픈 노인들이 병원에서 잔뜩 받아온 약이 서로 부작용을 일으키며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면서 “노인병은 근본적인 원인을 잘 찾아서 해소하면 약을 줄이면서도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멘토는 일본 도쿄대에서 노인의학을 배우고 분당서울대병원에 노인병내과를 처음 설립한 김철호 전 서울의대 내과 교수와 ‘약을 빼는 것’의 접근법을 가르쳐준 김광일 서울의대 내과 교수. 저출생 못지않게 중요한 우리나라 고령화 문제를 노인의학 차원에서 대처하고 준비하자는 계획을 가르쳐준 분들이다.
해외 활동을 통해서 노인병학 교과서로 유명한 윌리엄 하자드(William Hazzard), 김대현 하버드의대 교수, 싱가포르 노인의료를 이끌고 있는 필립 추(Phillip Choo) 탄톡셍병원 노인병 교수 등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필립 추는 고령 환자 개인을 중심에 놓고 노화 정도에 따라 맞춤형 진료를 해주는 의료시스템을 만들고 발전시켰다고 한다.
정 교수는 “우리나라 병원은 개별적인 병에 치우쳐 환자를 진료하다 보니 악순환이 이어진다”면서 “싱가포르처럼 사람을 중심에 두고 국가 단위로 노쇠를 예방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