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가 구부러졌어요. 허리도 펴고! 이 부분 다시 해보죠.”
지난달 24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의 한 음악연습실. 다섯 명 새내기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선율 사이로 바이올리니스트 이상희(48)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자선 연주단 ‘이상희 & 프렌즈’의 단원들. 오는 9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여의도 영산아트홀에서 열리는 ‘국립암센터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앞두고 막바지 연습 중이었다.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을 1등상으로 졸업한 이씨는 2004년 귀국해 서울시립교향악단, 서울필하모닉 등과 협연한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유학 중에도 재능 기부로 연주회 봉사를 해왔던 이씨는 지난 2007년부터 국내에서 자선 연주를 시작했다. 서울대에 본부를 둔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가 개소 10주년을 앞두고 “백신을 지원 받는 개발도상국의 가난하고 아픈 아이들에게 연주로 희망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부터다. 그보다 2년 전인 2005년 국제백신연구소에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던 게 인연이 됐다. 제자 4명과 함께 첫 자선 연주회를 열었고, 이것이 ‘이상희 & 프렌즈’의 시초가 됐다. 이후 연주단은 매년 여름 콘서트를 열어 현재까지 누적 3억3500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모아 국제백신연구소에 전달했다.
4명에서 시작한 연주단 인원은 16년 만에 107명으로 불어났다. 모두 지인의 소개나 소문을 듣고 모인 이들이다. 전문 음악인만 찾아온 것도 아니다. 중소기업 대표, 간호사,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좋아하고 봉사하겠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연주회에도 107명 모두 참여한다. 이씨는 연주단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자발성에서 비롯된 팀워크’를 꼽는다. 그는 합주할 때 합이 정말 잘 맞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마음이 모인 결과물”이라며 “모두가 하나가 돼 만들어내는 선율을 무대에서 느낄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고비도 있었다. 이씨는 2018년 7월 정기 연주회를 한 달 앞두고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연주하다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앞섰지만 8월 초로 잡힌 연주회를 위해 수술 날짜를 한 달 뒤로 미뤘다. 그는 “연주회는 단원들과의 약속이기에 어길 수 없었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지금은 후유증이나 전이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번 국립암센터 연주회도 암 투병을 계기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것이다. “암 투병 환자가 다른 암 환자들을 위해 연주한다면 뜻 깊지 않겠나”라는 제안에 응했다. 연주회로 모인 후원금은 항암제 개발 등에 쓰인다. 그는 “우리가 쓰는 항암제 중 국내에서 생산한 약품이 아직 없다더라”며 “한국인에게 부작용도 덜한 항암제가 개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자선 연주단을 이끌며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제자들의 기부 소식이 들려올 때다. 그는 “열한 살 때부터 가르친 제자가 미국 명문대에 입학한 뒤 바이올린 과외로 번 첫 월급을 국제백신연구소에 기부했다고 연락을 해왔는데 너무 기특하고 반가웠다”며 “제자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기부할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여든 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연주회를 계속하고 싶다”며 “지금처럼 남을 위하는 내 마음이 변치 않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