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후나야마(船山) 고분.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본 강건우 서울대 1학년 학생은 “일본 문화재인데도 우리 것과 너무 비슷해 이국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며 “백제 문화가 일본에 많이 전파됐다고 배웠는데 직접 보니 역사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다”고 했다.
5세기 후반 일본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나야마 고분에서는 92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 중 상당수가 백제 유물과 닮았다. 청동거울은 백제 무령왕릉의 그것과 비슷하다. 금동관이나 금동 신발은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이나 전북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은 거의 똑같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금동관이나 금동 신발은 백제에서 전래된 것이 명확하다”며 “그렇다고 백제가 우월적 지위에서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보긴 어렵다. 서로 교류 관계를 맺은 근거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일본에 있는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며 한·일 관계 역사를 짚어보는 ‘제43회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 지난 5~9일 열렸다. 조선일보가 주최하고 신한은행·GS·포스코가 후원하는 이 행사는 1987년부터 매년 1~2회 개최했다. 그동안 교사·대학생 등 총 1만8000여 명이 참여했다. 코로나 사태 등으로 2018년 이후 4년 만에 열린 이번 탐방엔 대학생과 일반인 등 150명이 참가했다.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명예교수, 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현장 해설을 맡았다.
참가자들은 일본 유적지 곳곳에서 한민족의 숨결을 마주했다. 규슈 사가현 아리타(有田)에서는 조선 출신 도공(陶工) 이삼평(李參平·?~1655년)을 만났다. 충남 공주 출신인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사가현 영주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고, 일본의 대표적 도자기 아리타 도기의 도조(陶祖)가 됐다. 그가 죽은 지 3년 뒤 이 마을 사람들은 ‘도잔(陶山)신사’를 만들어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1917년에는 ‘도조 이삼평 비’도 만들었다. 지금도 직계 자손이 도자기 제작을 하면서 ‘14대 이삼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웃 나라 학생들을 맞이한 14대 이삼평이 또렷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학생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부지원 공주대 3학년 학생은 “도공이 일본에 많이 끌려갔다는 건 알았지만 아리타 도자기 시조가 조선 도공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며 감탄했다.
나라현 아스카의 다카마쓰(高松) 고분 벽화에서는 고구려 벽화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했다. 한창훈 건국대 1학년 학생은 “다카마쓰 벽화는 책에서만 봤는데 직접 보니 새롭고 실감이 난다”며 “문화 교류의 현장을 접하니 한·일 간 바람직한 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고 했다.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테라(飛鳥寺)는 백제 왕흥사가 원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교토 고류지(廣隆寺)에서는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을 쏙 빼닮은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만났다. 서정석 교수는 “아스카테라를 지을 때 백제가 기술자를 일본에 보냈다”며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백제”라고 했다.
교류의 흔적만 있는 게 아니다. 침략과 갈등의 아픈 역사도 있다. 차가운 바닷바람 부는 시모노세키 해안가에는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을 체결한 공간이 재현돼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규슈의 나고야 성터에서는 조용한 탄식이 흘렀다. 한·일 간 오랜 교류를 단절시킨 불행한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된 셈이다. 강하영 한양대 1학년 학생은 “일본이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 조선은 대비를 못 했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다”며 “역사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교류와 갈등이 반복된다는 걸 새삼 배우게 된다”고 했다.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한·일 양국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공존과 공생으로 나아간 관계”라며 “곳곳에 남겨진 유적과 유물이 이런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카·나라·구마모토=정녹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