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토포하우스에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한 발달장애인 배우 정은혜 그림 에세이 출간 간담회 및 개인전 개막식이 열렸다. 오른쪽 그림엔 은혜씨 자신과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언니 역을 맡은 배우 한지민(오른쪽)이 담겼다.고운호 기자

꽃처럼 피어나야 할 20대에 정은혜(32)씨는 ‘동굴’에서 살았다. 학령기를 넘기자 다운증후군을 가진 그를 받아줄 곳은 세상에 없었다. 직업도 가질 수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문을 잠그고 방에 틀어박혔다. 틱 장애가 생기고 남들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시선 강박도 겪었다. 환청·환시에도 시달렸다. 동굴 안 은혜씨가 괴로워 소리 지를 때, 바깥의 가족들은 숨을 죽였다. 보다 못한 엄마 장차현실(57·만화가)씨가 딸을 밖으로 끌어냈다. “엄마 화실에 와서 청소해. 한 달에 30만원 줄게.” 화실에 나온 은혜씨는 어느덧 학생들 틈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2013년 12월의 일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은혜씨 작가라고 합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씨 친언니 역을 맡은 정은혜라고 합니다.”

24일 서울 인사동의 한 전시장. 정은혜씨가 천천히, 또박또박 인사했다. 그림 에세이 ‘은혜씨의 포옹’(이야기장수) 출간 언론 간담회 자리. 책에는 은혜씨가 가족, 친구, ‘우리들의 블루스’에 함께 출연한 배우 한지민·김우빈 등과 포옹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28점이 실렸다.

엄마의 화실에서 붓을 들기 시작한 은혜씨는 집 근처 벼룩시장인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 ‘니얼굴’이라는 부스를 차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2016년 8월부터 지금까지 약 4000명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은혜씨는 다시 사람들과 눈을 맞출 수 있게 됐다. 예술이 일궈낸 치유의 힘. “나는 그림 그릴 때가 좋아요.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아요. 내 그림을 선물할 수 있잖아요. 그림은 누군가에게 내가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거예요.”

엄마와 함께 한 정은혜씨/ 고운호 기자

그림이 인기를 끌고, 드라마에 출연해 유명해진 후 은혜씨의 삶은 달라졌을까? 엄마는 “은혜는 똑같은데 세상이 은혜를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세상이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자기 그림도 놓고 딸을 보조하고 있는 엄마는 “가족 중 발달장애인의 삶이 어떤가에 따라 나머지 가족들의 삶이 결정된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온 가족이 은혜의 작품 활동을 지지한 것은 ‘으아, 나 좀 살자!’라는 각자의 사정 때문”이라며 웃었다. “이제는 은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은혜씨는 말했다. “엄마. 늙었지만 정말 고생했어. 나를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