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사민당(SPD) 총재를 맡고 있던 1986년 8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사민당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빌리 브란트(Brandt) 전 서독 총리가 2차 대전 직후인 1948~1952년 사이에 독일에서 활동하던 미국방첩부대(CIC)의 핵심 첩보원 역할을 했다고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1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그는 1969년부터 6년간 독일 총리로 재임하면서 동독과 폴란드, 소련 등 동유럽 공산국가와 화해 정책인 ‘동방 정책’을 통해 냉전 시기 유럽의 정치·군사적 긴장 상황을 완화하고 동·서독 통일의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현재 올라프 숄츠 총리가 몸담은 사민당(SPD) 총재를 1964년부터 23년간 지냈고, 동방 정책의 공로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0년 동·서독 통일 2년 뒤인 1992년 사망했다.

슈피겔은 미 육군 군사 역사 센터의 선임 연구원인 토마스 보그하르트를 통해 입수한 미국 정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서 브란트 전 총리가 CIC를 위해 일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CIC의 독일인 첩보원 명단에 ‘O-35-VIII’이라는 식별번호로 등록돼 관리를 받았으며, 5년여간의 활동 기간에 200여 차례 이상 자신의 차량과 아파트, 때로는 CIC의 안가(安家)에서 CIC 요원들을 만나 수집한 정보를 건넸다.

브란트 전 총리는 당시 사민당 동부 사무소 서베를린 지국의 총괄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동독 내 사회민주당(SBZ)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슈피겔은 “베를린 장벽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동독 인사들과 접촉해 기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CIC는 그를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서방의 친구”라고 기록했다.

브란트 전 총리가 CIC에 넘긴 정보는 동독 공산당을 모태로 탄생한 사회주의통일당(SED)과 산하 자유독일청년동맹(FDJ)의 동태, 동독 내 조선소·공장·철도망 등 산업 정보, 소련군의 전화·통신 장비 시스템 등에 대한 군사 정보 등이다. CIC는 그 대가로 매달 당시 서독인의 월평균 수입인 250마르크 혹은 이에 해당하는 담배와 설탕, 커피를 건넨 것으로 나타났다.

슈피겔은 브란트 전 총리가 이 과정에서 불법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 매체는 “연합국 분할 점령이 종료된 1955년 이전까지 서독은 주권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브란트 전 총리에게 (스파이나 반역 등의) 법 위반 혐의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CIC에서 받은 금품은 대부분 사민당 동부 사무소 업무에 지출했다”면서 “사민당 수뇌부도 어느 정도 알았지만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브란트 전 총리는 나치 집권 직후인 1933년 노르웨이로 망명해 신문사 기자로 일했다. 종전 후인 1947년 노르웨이군 공보 장교로 채용돼 독일에 돌아왔고, 1948년 사민당 입당과 함께 독일에 재정착했다. 그는 망명 시절에도 독일 점령지인 노르웨이와 덴마크, 중립국 스웨덴 내 정보를 수집해 연합군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슈피겔은 “브란트 전 총리는 미국산 위스키를 매우 좋아해 CIC 요원이 가끔 위스키를 가져오면 기꺼이 받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