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참전용사의 희생을 잊지 않고자 붓을 들었습니다.”
경북 칠곡군에서 화가 김기환(52)씨가 사진 한장을 손에 들었다. 사진에는 다섯 손가락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선명한 수술 자국이 보이는 누군가의 왼손이 찍혀 있었다. 지난 2002년 제2연평해전에 참전해 북한군을 상대로 응사했던 권기형(39)씨의 손이다.
김씨가 권씨의 사진을 받아든지 한달쯤 되었을까. 오는 26일 서해수호의 날을 하루 앞두고 ‘호국의 고장’ 칠곡군에 그림 선물이 배달됐다. 작가인 김씨가 극사실주의 유화로 그려낸 권씨의 왼손이었다.
김씨의 그림은 직각으로 굳은 약지와 엄지, 왼쪽으로 휜 검지 등 권씨 왼손의 특징을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생생하게 담아냈다.
제2 연평해전 당시 상병이었던 권씨는 북한 함정의 기관포탄을 맞고 왼손 손가락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K-2 소총 개머리판을 겨드랑이에 지지한 채, 탄창 4개를 한 손으로 갈아 끼우면서 적을 향해 응사했다.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중상을 입은 다른 동료들을 먼저 챙겼다.
전투 이후, 권씨의 으스러진 손마디 뼈는 골반 뼈로 대체됐다. 날아간 살점들은 손목의 살을 일부 떼어내 이식했다. 가까스로 왼손은 복원됐지만 손가락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연평해전이 끝난지 20년가까이 지난 요즘도 권씨는 진통제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작가인 김씨는 지난해 6월 22일 칠곡군이 6·25 전쟁 70주년 기념으로 진행한 호국 영웅 초청 행사에서 권씨와 그의 손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그는 올해 서해수호의 날에 맞춰 권씨를 위한 그림을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김씨는 “꿈에서도 권씨의 손이 생각났고, 사진을 받아들었을 땐 그날의 아픔이 내 왼손에서도 느껴져 작업이 어려웠다”면서도 “잊혀져가는 한 용사의 상처를 알리고 헌신에 대한 감사와 위로를 보내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과 한달간 씨름하며 그려낸 김씨의 작품은 권씨에게도 전달됐다. 손 그림을 접한 권씨는 “제 왼손이 남들에겐 안좋게 보일지 모르나, 제게는 언제나 영광의 상처”라면서 “마음의 상처까지 잘 표현해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대한민국을 위한 상처는 잊어서도, 잊혀져서도 안된다”며 “권씨의 왼손 그림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