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명의 참전 용사 사진을 찍으며 깨달았어요. 한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우리는 앞으로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6·25 참전 용사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 라미 현은“2023년 참전 용사 촬영을 끝낸 뒤에는 경찰관 등‘제복 입은 영웅들’의 사진도 찍을 것”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18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만난 사진작가 라미 현(42·현효제)은 자신의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사연 한 개씩을 풀어놓았다. “이분은 네덜란드 육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셨는데, 몸에 파편이 수십 개가 박혔다고 합니다.” “버뮤다에 파병되는 줄 알고 배를 탔는데, 눈 떠보니 부산항이었대요.” 2017년부터 미국, 영국, 터키, 에티오피아 등 세계 각국을 직접 방문해 6·25 참전 용사 사진을 촬영하고 이를 액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그 중 80여 점을 지난 13일 개막한 전시회에서 선보이고 있다. 현씨는 “사진을 건네면 구순의 참전 용사가 어린아이처럼 웃는다”며 “카메라 렌즈를 팔아서라도 이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라고 했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미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에서 공부했다. 패션 광고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군복 입은 사람들’을 찍게 된 계기는 2013년 한 육군 원사와의 만남이었다. “‘28년 군 생활을 하면서 나라에는 부끄럽지 않았는데,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는 부끄럽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대 일을 챙기느라 정작 자기 가족은 챙기지 못한 거예요.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비하했던 저 자신이 부끄럽더군요. 그때부터 군인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군복과 국군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던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두 번째 군인은 미 해병대 출신 참전 용사 살바토르 스칼라토였다. 2016년 현씨의 군복 사진전을 관람하러 온 스칼라토는 ‘나는 한국전 참전 용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은 게 참전 용사 촬영 프로젝트의 시작이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미 메릴랜드주에서 촬영한 윌리엄 웨버 예비역 육군 대령이다. 51년 강원도 원주에서 전투 중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잃은 그는 촬영차 방문한 현씨에게 “나는 자유를 지킬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은 나에게 빚진 게 없다. 대신 당신들에게 의무는 있다. 북녘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노부부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2019년 어느 날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도 참전 용사인데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느냐'고 묻길래 흔쾌히 그러자 했죠.” 상대방이 말했다. “저희 아버지 성함은 백선엽입니다.” 깜짝 놀라 당장 다음 날 찍으러 가겠다고 했다. 백 장군과 아내 노인숙 여사가 손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뒤에서 담았다. 그는 “살아오신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여사께서 ‘저는 인터뷰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기억해주세요’라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현씨는 6·25 정전 70주년인 2023년까지 참전 용사 촬영을 계속할 계획이다. “시간이 없어요. 코로나 때문에 작년 미국 투어 촬영이 좌초됐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려고요.”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의 평균 연령이 88세다. 사진은 찍었는데, 전달하기 전 세상을 떠난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한결같은 흰색 배경은 인물 사진의 거장인 미국의 리처드 애버던(1923~2004)을 오마주한 것이다. 흑백으로 찍는 이유는 무엇일까. “색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져요. 하지만 흑백으로 찍으면 남는 건 오직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정신입니다. 앞으로도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정신을 후대에 남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