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명의 참전 용사 사진을 찍으며 깨달았어요. 한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우리는 앞으로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18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만난 사진작가 라미 현(42·현효제)은 자신의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사연 한 개씩을 풀어놓았다. “이분은 네덜란드 육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셨는데, 몸에 파편이 수십 개가 박혔다고 합니다.” “버뮤다에 파병되는 줄 알고 배를 탔는데, 눈 떠보니 부산항이었대요.” 2017년부터 미국, 영국, 터키, 에티오피아 등 세계 각국을 직접 방문해 6·25 참전 용사 사진을 촬영하고 이를 액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그 중 80여 점을 지난 13일 개막한 전시회에서 선보이고 있다. 현씨는 “사진을 건네면 구순의 참전 용사가 어린아이처럼 웃는다”며 “카메라 렌즈를 팔아서라도 이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라고 했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미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에서 공부했다. 패션 광고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군복 입은 사람들’을 찍게 된 계기는 2013년 한 육군 원사와의 만남이었다. “‘28년 군 생활을 하면서 나라에는 부끄럽지 않았는데,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는 부끄럽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대 일을 챙기느라 정작 자기 가족은 챙기지 못한 거예요.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비하했던 저 자신이 부끄럽더군요. 그때부터 군인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군복과 국군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던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두 번째 군인은 미 해병대 출신 참전 용사 살바토르 스칼라토였다. 2016년 현씨의 군복 사진전을 관람하러 온 스칼라토는 ‘나는 한국전 참전 용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은 게 참전 용사 촬영 프로젝트의 시작이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미 메릴랜드주에서 촬영한 윌리엄 웨버 예비역 육군 대령이다. 51년 강원도 원주에서 전투 중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잃은 그는 촬영차 방문한 현씨에게 “나는 자유를 지킬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은 나에게 빚진 게 없다. 대신 당신들에게 의무는 있다. 북녘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노부부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2019년 어느 날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도 참전 용사인데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느냐'고 묻길래 흔쾌히 그러자 했죠.” 상대방이 말했다. “저희 아버지 성함은 백선엽입니다.” 깜짝 놀라 당장 다음 날 찍으러 가겠다고 했다. 백 장군과 아내 노인숙 여사가 손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뒤에서 담았다. 그는 “살아오신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여사께서 ‘저는 인터뷰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기억해주세요’라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현씨는 6·25 정전 70주년인 2023년까지 참전 용사 촬영을 계속할 계획이다. “시간이 없어요. 코로나 때문에 작년 미국 투어 촬영이 좌초됐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려고요.”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의 평균 연령이 88세다. 사진은 찍었는데, 전달하기 전 세상을 떠난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한결같은 흰색 배경은 인물 사진의 거장인 미국의 리처드 애버던(1923~2004)을 오마주한 것이다. 흑백으로 찍는 이유는 무엇일까. “색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져요. 하지만 흑백으로 찍으면 남는 건 오직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정신입니다. 앞으로도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정신을 후대에 남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