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울 신사동 클래식 음반점 풍월당.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와 첼리스트 문태국이 이중주를 펼쳤다. 곡명이 독특했다. ‘빨리 빨리(Pali Pali)!’. 느릿느릿 숨을 고르듯이 시작한 이중주는 제목처럼 점점 호흡이 가빠지더니 격렬한 템포로 변해갔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현대음악 작곡가인 김택수(41) 미 샌디에이고 주립대 교수의 작품. 김 교수는 “처음 작품을 위촉 받을 때 ‘급하니 빨리 써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지만, 한번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적 정서도 담으려 했다”며 웃었다.
이날 연주는 김 교수가 작곡한 실내악 작품들로 채운 첫 독집 음반 발매 기념으로 마련됐다. 가수나 연주자의 음반 발표회 자리는 적지 않지만, 현대음악 작곡가의 작품으로 독집을 내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김 교수는 소프라노 조수미와 신영옥, 그래미상을 받은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 등 국내 음악가들의 음반 30여 장에 편곡자로 참여한 음악계 ‘약방의 감초’. 하지만 자신의 작품으로 독집 음반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화학자를 꿈꾸던 과학 영재 출신이다.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고, 1998년 호주에서 열린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서는 한국 대표로 참가해서 은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졸업 후에 작곡과로 편입해서 미 인디애나 음대에서 유학했다. 지난해 뉴욕 필하모닉이 그의 관현악 ‘스핀-플립’을 연주했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등 미국 명문 악단들도 그의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 받는 작곡가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유달리 한국어 제목이 많다. 2015년 유럽에서 초연한 비올라 협주곡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재울 때 내는 의성어인 ‘코오(Ko-Oh)’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음 달 부산시향이 초연하는 관현악곡의 제목도 잔을 부딪칠 때 내는 ‘짠(Zzan)!!’이다. 음반 첫 곡으로 실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역시 3악장에 ‘끼’ ‘모’ ‘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조선 시대 기생의 끼, 어머니의 모정, 무당의 무속을 통해서 다채로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연주할 때에도 외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제목을 그대로 쓴다. 김 교수는 “외국 관객들에게는 이국적으로 들리더라도 가감 없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한국과 세계의 경계에서 다리 역할을 하면서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