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한예리, 스티븐 연 등 3월 3일 개봉하는 영화 '미나리' 배우들과 정이삭 감독. 서로 싸우면서 사랑하는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다. /판씨네마

여배우는 대부분 ‘요절’한다. 생물학적인 게 아니라 영화적인 죽음이다. 주인공을 연기하다 배역이 작아지고 뒤로 밀려나며 결국 스크린을 떠난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존재감을 잃지 않는 배우는 극소수다.

윤여정(74)은 그래서 독보적이다. 해방 후 태어나 6·25를 겪었다. 예능 프로그램 ‘윤스테이’가 요즘 보여주듯이 옹골찬 현역이다. 외국인들에게 “나는 이 비즈니스를 꾸려가야 하니 잊지 말고 아침에 신용카드 가져와. 도망치면 경찰 부른다”고 영어로 농담할 줄 아는 할머니다.

3월 3일 개봉하는 영화 ‘미나리’는 한국 시간으로 삼일절에 발표되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있다. 1980년대 미국 아칸소로 이민 간 가족 이야기를 미국 자본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배우 브래드 피트가 우두머리인 플랜B가 제작했고 한국어 대사가 80%에 이른다. 26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윤여정은 “지금 캐나다 밴쿠버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영어를 쓰다가 한국말로 하려니까 복잡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로 세계에서 26개 상을 받았는데 나는 아직도 하나밖에 손에 쥔 게 없어(웃음). 실감을 못 해요. 미국 할리우드 배우도 아니고 이 나라는 땅덩이가 크니까 상이 많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감독들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배우를 가둬 놓는데 정이삭 감독은 달랐어요. ‘전형적인 할머니를 연기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유를 줬어요. 순자는 같이 만든 캐릭터입니다. 저는 계획하고 뭘 하는 사람이 못 돼요.”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은 어릴 적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다.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에 녹였다. 국경도 언어도 문화도 뛰어넘는다. 인천 송도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는 그는 “연구실 밖으로 갯벌이 보였는데 내 엄마도, 할머니도 저렇게 조개를 캐며 살았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며 “할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제 어머니를 바닷가에서 키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영화 ‘미나리’에는 할머니(윤여정)가 입안에서 깨문 삶은 밤을 손자 입에 넣어주는 대목이 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장면이다. 윤여정은 “제가 미국에서 살면서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며 “아일랜드 출신이던 친구 남편이 놀라며 ‘이래서 너희들은 간염에 걸린다. 더럽다’고 했던 기억을 넣자고 제안했다”며 말을 이었다. “손자와 할머니가 한 방에서 자는 장면도 있어요. 제가 정이삭 감독에게 ‘한국 할머니는 손자와 한 침대를 쓰지 않고 방바닥에서 잔다’고 귀띔해 세트를 바꿨습니다(웃음).”

이날 정이삭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은 미국에서, 한예리는 한국에서, 윤여정은 캐나다에서 모처럼 온라인으로 만났다. 영화 ‘버닝’으로 기억되는 스티븐 연은 “한예리는 무엇보다 진실되고 그 배역을 사는 배우라서 자연스럽게 연기했고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자식은 부모를, 부모는 자식을 잘 모른다. 한예리는 “촬영하면서 부모 세대를 이해하게 됐다”며 “관객도 이 영화를 그렇게 감상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배우들은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윤여정은 “연기 잘못 한 건 없는지 찾느라 즐기지를 못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보고 오히려 놀랐다”며 “감독이 무대에 올라갔을 때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걸 보고 울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노배우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뭔가를 이뤄내고 나보다 나은 걸 볼 때 장하고 애국심이 폭발해요. 이렇게 많은 상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죠. 상상하고 만들진 않았거든요. 경악스러울 뿐입니다.”

26일 유튜브로 진행된 영화 '미나리' 온라인 기자간담회. 윤여정은 캐나다, 한예리는 한국, 스티븐 연과 정이삭 감독은 미국에서 접속했다. 윤여정은 "조그만 돈으로 만든 영화가 해외에서 생각지도 않은 기대와 관심을 받아 처음엔 좋았다"면서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이젠 떨린다"고 했다. /유튜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