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노랑·파랑, 오색 찬란한 색동 비단 셔츠에 커다란 리본이 멀티미디어 작가 도로시 M 윤(윤미연·44)의 얼굴을 더욱 화사하게 빛냈다. 색동으로 꾸며진 LED 전광판 앞에서 미니마우스처럼 귀가 쫑긋한 머리띠를 하고 포즈를 취하니 그 자체로 행위예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색동으로 디자인한 시계다. 스위스 최대 시계업체인 스와치 그룹의 대표 브랜드 스와치(Swatch)가 그녀와 손잡고 내놓은 한정판 시계다. 키스 해링, 데이미언 허스트 등 해외 유명작가와 협업해온 스와치가, 자체 육성하는 레지던시 작가 중 선택한 첫 한국 작가다.

자신이 디자인한 색동 블라우스에 커다란 머리 장식을 한 도로시 M 윤 작가는“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이 시간을 견디면 기적 같은 마법의 순간이 길 앞 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이화여대 조소과와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한 도로시 윤은 2년 전 스와치가 세계 젊은 작가를 상대로 지원하는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상하이 아트 피스 호텔’ 작가로 선정됐다. 지난해 스와치 후원으로 베네치아 비엔날레 무대에 섰고, 일본 작가와의 마지막 경쟁을 뚫고 올해 상하이 아트 피스 호텔 10주년을 기념한 협업 작가로 최종 발탁됐다. 그가 태어난 해를 따서 1976개만 한정 제작됐다.

“색동은 내게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라고 그가 말했다. 9년 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모든 걸 포기해야 하나’ 절망했다. “항암 주사를 맞는데 갑자기 온몸에서 오색 불꽃이 이는 듯한 경험을 했어요. 색색의 향연이 눈앞에 터지는데, 제가 극복해야 할 어두운 터널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마법처럼 느껴지더군요. 이 고통의 코너만 돌면 즐거운 선물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와치 측에선 그의 색동을 ‘희망의 아이콘’으로 해석했다. 암 투병 하며 체험했던 커다란 주사는 시계에서 ‘요술봉’으로 치환돼 디자인됐다. “요술봉을 휘두르면 ‘뽀로롱’ 하고 세상을 구하거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잖아요. 모세도 홍해를 열어준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고, 도교와 불교 사제들도 지팡이를 갖고 있지요. 우리나라엔 도깨비 방망이!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엔 모두에게 요술봉 하나는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예명인 ‘도로시’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따왔다. 학생 시절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을 만나고 싶어 도로시의 새빨간 구두를 재해석한 작품을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향했지만, 여권을 잃어버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만남까지 무산된 뒤 ‘도로시가 내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백남준 선생님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는데, 예술이라는 게 대가(大家)의 한마디 말씀도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도로시의 신발’처럼 그 답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죠.”

도로시가 만났던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 등 어느 누구도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 “꿈은 언제나 수퍼스타죠, 하하! 관객의 잠자는 예술혼을 깨워주고 싶어요. 이 마법의 요술봉으로요!”